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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희망’이라는 유산 물려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입력 : 2015-11-05 19:58:09 수정 : 2015-11-05 19:5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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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신작 ‘해질 무렵’
“좀 사랑해주지 그랬어.”

자살한 아들과 애매한 관계였던 여자에게 죽은 아들의 엄마가 던진 말이다. 원망보다는 안타까움이다. 여자는 애써 참고 있다가 물주머니가 터진 것처럼 눈물을 흘렸다. 황석영(72)이 ‘여울물소리’ 이후 3년 만에 펴낸 경장편 ‘해질 무렵’(문학동네·사진) 한 대목이다.

30대 초반 김민우는 비정규직마저 잘려 각종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또래들과 동반 자살했다. 그 아들과 동지애를 나누었던 정우희라는 여자. 자신이 하고 싶은 연극 연출을 하지만 생계를 꾸리기에는 벅차 편의점 등을 전전하는 아르바이트 인생이기는 김민우와 마찬가지였다. 정우희는 검은 셔츠만 입고 다니는 민우와 피자집 종업원으로 가까워져 민우 엄마와도 잘 알게된 사이였다.

3년 만에 장편소설을 펴낸 소설가 황석영. 그는 “출세한 한국 중산층의 회한을 다루고 싶었다”면서 “이념이나 이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지만 사람살이의 우여곡절은 늘 감동을 준다”고 말했다.
이들이 이번 소설의 전면적인 주인공은 아니다. 방점은 그들 부모 세대에 찍혀 있다. 좋아했던 남자를 아들 이름으로 지은 김민우의 엄마 차순아, 그네와 더불어 산동네 ‘달골’에서 살았던 박민우가 그들이다. 박민우는 경상도 영산에서 서울 산동네로 이사와 청소년기를 보내다 공부로 계층 상승을 이루어 밑바닥을 탈출한 경우다. 그는 달골에서 국숫집 딸 순아와 애틋한 시절을 보냈지만, 중산층으로 향하는 사다리를 타고 시대에 대한 부채의식은 좌절과 체념의 포즈로 위무하면서 무난하게 살아왔다. 건축설계사인 그는 생각한다.

“나는 이미 오래전에 사람과 세상은 믿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시간이 지난 뒤에 사람들의 욕망은 그런 가치들 가운데 남길 것만 조금 걸러내고 대부분을 자기 위주로 변형시키거나 폐기처분해버린다. 조금 남겨두었던 것들마저 마치 오래전에 소비했던 낡은 물건처럼 또다른 기억의 다락방에 처박힌다. 건물을 무엇으로 짓느냐고? 결국은 돈과 권력이 결정한다. 그런 것들이 결정한 기억만 형상화되어 오래 남는다.”

박민우의 냉철한 현실 인식에 비하면 “건축이란 기억을 부수는 게 아니라 그 기억을 밑그림으로 사람들의 삶을 섬세하게 재조직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선배의 생각은 몽상가의 이상에 가깝다. 그가 지나온 세월의 ‘좌절과 체념’은 ‘작은 상처에 박인 굳은살’이 되어버렸고 그것은 어쩌다가 약간의 이질감이 느껴지는 양말 속 자각일 뿐이었다. 그가 뒤늦게 차순아의 편지를 받고 옛날을 회상하며 버리고 온 것, 실수한 것, 진정으로 놓치지 말아야 했을 것들을 떠올리는 내용이 이 소설의 중심 얼개다. 황석영이 성찰하는 작금 기성세대 회한의 핵심은 서울 야경을 내려다보는 박민우의 이 반성에 있다.

“억압과 폭력으로 유지된 군사독재의 시기에 우리는 저 교회들에서, 혹은 백화점의 사치품을 소유하게 되는 것에서 위안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온갖 미디어가 끊임없이 쏟아낸 ‘힘에 의한 정의’에 기대어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결국은 너의 선택이 옳았다고 끊임없이 위무해주는, 우리가 함께 만들어낸 여러 장치와 인물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나도 그런 것들 속에서 가까스로 안도하고 있던 하나의 작은 부속품이었다.”

이즈음 젊은 세대가 ‘헬조선’을 부르짖는 현실이 소설보다 더 원색적인 건 사실이지만, 소설 속 민우의 자살은 당혹스럽다. 늘 치열하게 살아왔고 “언제나 뛰어나갈 자세로 총기 청소도 실탄 장전도 모두 끝낸 병사처럼 멀리 사선을 내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고 묘사한 그 젊은이는 그리 쉽게 죽어야만 했을까. 전후 척박한 환경에서도 베이비들은 붐을 이루어 태어났고 산동네 판잣집에서도 삶에 대한 애착은 강렬했다. 아들 세대에게 ‘희망’이라는 유산을 물려주지 못한 작금의 현실이야말로 박민우 세대의 최대 과오일지 모른다.

황석영은 “1980년대 생성된 서구적 의미의 중산층은 신군부가 남긴 떡고물에 기대어 시대의 억압에 눈감고 소비 대중으로 전락한 측면이 있다”면서 “한국사회 현대사에서 출세한 그들, 중산층의 회한을 다루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한국 천민자본주의의 회한을 다루는 일이야말로 문학의 일 아닌가”라고 반문하며 “그 회한을 개인적인 이야기로 바꾸어 해본 것”이라고 덧붙였다. 황석영은 이번 소설 ‘작가의 말’에 “개인의 회한과 사회의 회한은 함께 흔적을 남기지만, 겪을 때에는 그것이 원래 한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서 “우리는 진작부터 뒤돌아보아야 했었다”고 썼다.

글·사진=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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