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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립자강 못한 조선·제국주의 일본… ‘통한의 역사’ 낳았다

입력 : 2015-08-14 20:30:34 수정 : 2015-08-14 20:3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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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달 지음/최덕수 옮김/열린책들/1만5000원
근대 조선과 일본-조선의 개항부터 대한제국의 멸망까지/조경달 지음/최덕수 옮김/열린책들/1만5000원


‘근대 조선과 일본’은 망해가는 조선과 발흥하는 일본의 근본적 차이가 어디에 있는지를 추적한 책이다.

일본 지바대학교 문학부 교수인 저자는 발전된 서구문명과 접촉하며 현대 국가로 연착륙한 일본과 달리, 조선은 종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이유를 정치문화의 차이에서 찾았다. 주자학에 기초한 지배 이데올로기는 조선에서도, 일본에서도 확실히 기능을 발휘했다. 조선에서는 통치 원리 그 자체였다. 이에 비해 일본에서는 일종의 통치 수단에 불과했다. 이런 탓에 조선은 근본적으로 스스로를 바꾸기 어려웠다는 것. 이는 서구의 충격에 대응하는 방식에서 중요한 차이를 초래했다.

조선은 유교적 민본주의를 고수했다. 이런 사상은 최익현 등 위정척사파만이 아니라, 조선의 근대화를 꿈꾼 개화 사상가들조차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다. 지배 계급만이 아니라 민중 세계도 이러한 정치 문화를 마음속 깊이 내면화하고 있었다. 민란과 농민 전쟁, 의병 지도자들 또한 이러한 ‘일군만민 사상’을 봉기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숭문(崇文)의 나라임을 자부하는 조선이 서구와 만나 무위(武威)의 나라임을 자부하는 일본 이상으로 서구에 항전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민중이고 지배계층이고 할 것 없이 모두 유교 문화를 절대 수호할 필요가 있었다.

반면 일본에서 주자학은 한낱 통치 수단일 뿐이었다. 일본에서는 지켜야 할 ‘도(道)’란 존재하지 않았다. 무사도 즉 무력이 우선이었다. 서구의 충격에 저항하기 위해 일본인들은 ‘도’ 아니라 ‘국체(國體)’를 내세웠다. ‘도’ 위에 ‘나라를 위치시킨 요시다 쇼인의 ‘국체’ 사상은 널리 퍼졌다.

이는 메이지 헌법에서 현대 일본의 국가 원리로 확립되었다. 다시 말해 유교는 국체를 보호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결코 통치 원리가 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저자는 “병합은 분명 한국인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치욕이었지만, 일본인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었다”면서 “일본은 한국 병합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선은 자력으로 근대화할 수 없고, 방치해 두면 나라마저 빼앗길지 모르기 때문에 일본이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정체적, 타율적 사관을 유포시켰다”고 지적했다. 이른바 식민지 사관이다. 저자는 “이 책은 이러한 식민지 사관의 극복을 위한 새로운 사관의 검토를 제안한다”면서 “내재적 발전론, 식민지 근대화론, 식민지 근대성론 등이 그것”이라고 했다.

이상각 지음/유리창/1만8000원
조선정벌-기획에서 병탄, 패전까지 1854-1945/이상각 지음/유리창/1만8000원


신간 ‘조선정벌’은 일본이 조선 지배 야욕에 시동을 걸었던 1854년부터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의 한국 근대사를 다뤘다.

저자는 무력하고 허약한 왕, 사대주의에 찌든 고위 관리의 무능과 매국세력이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역사를 초래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고통은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 됐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역사적으로 조선이 자립자강이 빈틈을 보였을 때 가장 심대한 타격을 가했던 존재가 바로 그들(일본)이었다”며 “성찰하지 않고 대비하지 않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경고한다. 지금도 일본은 군국주의 부활을 꿈꾸며 패전 후 전쟁을 금지한 평화헌법 개정을 시도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정승욱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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