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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 품종 역사에 담긴 한국인의 삶

입력 : 2015-08-06 20:56:15 수정 : 2015-08-06 20:5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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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7개 주제로 광복 70년 기념 학술대회 “우리 앞의 밥 한 그릇 안에 냉전체제, 한국의 중화학공업화와 농촌개발정책, 민주화와 소비사회의 신장, 세계화 등이 녹아들어 있다.”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김태호 교수는 ‘밥으로 읽는 한국 현대사’란 제목의 글을 이렇게 끝맺는다. 1950년대 이후 벼품종 개발의 역사를 훑은 끝에 내린 결론이다.

김 교수에 따르면 1950년대 냉전체제가 세계질서로 자리 잡을 무렵 미국은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등의 신생독립국들이 공산주의로 기울지 않도록 하는 데 골몰했고, 절대 빈곤을 해결함으로써 신생독립국의 ‘적색혁명’을 해결하려 했다. 당시 미국의 록펠러재단, 포드재단 등은 동남아시아 국가를 중심으로 농업 발전을 위한 막대한 자금과 인력을 투입했다. 그 결과 수확량이 많고 병충해에도 강한 새로운 벼품종인 ‘IR8’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1970년대 통일벼 생산은 쌀의 자급자족을 실현하며 농촌개발정책은 물론 공업화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1960년대 한국의 벼품종 개발은 이 지역의 농학을 배움으로써 본격화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1971년에 이르러 마침내 ‘통일벼’ 생산에 성공했고, 이의 보급 확대를 위한 정책을 강력하게 펼쳤다. 그러나 통일벼는 한국인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결정적인 단점 때문에 내내 문제가 됐다. 1978∼80년까지 3년간 도열병, 이상저온 등으로 통일벼 재배가 결정적인 타격을 받으면서 농민들 신뢰를 잃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박정희정권의 유신체제에서 누적되어 온 각종 불만과도 결부돼 농민저항으로 이어졌고, 부당하게 집권한 신군부 세력은 ‘통일벼 퇴출’을 통해 농촌 민심을 달래려 했다. 통일벼는 정부가 보관하고 있던 것까지 소진된 1995년 ‘한국판 녹색혁명’이란 소임을 다하고 퇴장하게 됐다.

통일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커져 가던 1980년대에는 쌀소비량 감소라는 새로운 흐름도 생겨났다. 경제개발과 서구화 여파로 한국인 식생활 전반이 바뀌게 되어 쌀의 위상도 변했던 것이다. 1인당 연간 쌀소비량은 1982년 156.2㎏으로 최고점을 찍은 뒤 감소세로 돌아서 2012년에는 69.8㎏까지 떨어졌다.

김 교수는 이 글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주최로 7일 열리는 ‘주제어로 보는 광복 70년과 한국인의 삶’ 학술대회에서 발표한다. 학술대회 참가자들은 ‘토지’ ‘주택’ ‘상품’ ‘쌀’ ‘학교’ ‘주민등록’ ‘가족’을 한국인의 삶에서 뗄 수 없는 주제어로 삼아 광복 70년간 한국 사회의 변화와 한국인의 삶을 조명한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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