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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그늘’에 가려진 그녀들 부활하다

입력 : 2015-07-27 02:58:12 수정 : 2015-07-27 02:5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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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왕실여성 인물사전’ 발간
고종이 가족들과 함께 찍은 사진. 왼쪽 세번째가 외동딸 덕혜옹주이고 가운데 고종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순종효황후 윤대비, 덕인당 김비가 서 있다. 남성 중심의 역사가 쓰여지다 보니 여성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아 여성사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조선의 성종이 둘째아들이란 약점에도 불구하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건 정희왕후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하응의 둘째아들은 조대비의 지명을 받아 고종이 되었다. 왕실, 국가에서 여성의 역할은 이처럼 가볍지 않았다. ‘한국 왕실여성 인물사전’(김창겸 등 지음,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은 고조선부터 조선까지 기록이 남아 있는 왕비, 후궁, 공주 등 왕실 여성에 대한 정보를 모아 사전의 형식으로 만든 책이다. 사전에 담긴 여성들의 삶을 좇아가다 보면 그들의 다양한 면모를 접할 수 있다.

#엄격한 어머니

지소부인은 신라 태종무열왕의 딸이다. 김유신과 결혼해 아들 다섯과 딸 넷을 두었다. 그는 자녀들에게 매우 엄한 어머니였다. 나당전쟁 중 당나라 군대에 패한 아들 원술은 아버지 김유신의 질책을 두려워해 숨어 살았다. 그가 지소부인을 찾은 것은 김유신이 세상을 뜬 뒤였다. 만나기를 청하는 아들에게 그의 대답은 단호하고 냉정했다.

“부인은 삼종(三從·여성은 아버지, 남편, 아들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전근대의 규범)의 의리가 있는데, 지금 내가 과부가 되었으니 아들을 따라야 하지만, 원술은 이미 선군(김유신)에게 아들 노릇을 하지 못하였으니 내가 어찌 그 어머니가 될 수 있느냐.”

성덕왕은 김유신을 잘 내조한 지소부인의 공을 높이 사 매년 곡식 1000석을 내렸다. 후일 여승(女僧)이 되어 생애를 마쳤다. 

왕비를 책봉할 때 내린 금보(金寶). 왕실 여성이 누렸던 권위와 짊어져야 했던 책임을 상징하는 듯하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강력한 정치인

고려 헌애왕태후는 ‘천추태후’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경종의 후비이며 18세에 과부가 되어 천추전에 살다 아들(목종)이 왕위에 오른 뒤 섭정을 했다. 헌애왕태후의 정치력은 탁월했다. 고구려 계승을 천명하며 태조 왕건의 북진정책을 이어갔다. 인재 양성에도 힘을 쏟아 목종 재위 12년 동안 과거시험을 7번 시행해 121명을 합격시켰다. 고려의 대표적 유교 군주로 꼽히는 성종이 82명의 급제자를 낸 것보다 많다. 국제관계에서 거란과 송나라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쳤다. 그러나 유교적 관점에서 쓰인 후대의 역사서에서 그녀에 대한 평가는 몹시 부정적이었다. 친척인 김치양과 관계해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 했다는 점을 후대의 역사가들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책은 그러나 “‘일부종사’가 강조된 것은 조선시대 이후고, 재혼녀가 왕비가 되기도 했던 고려시대에는 그 틀을 적용할 수 없다”며 “헌애왕태후는 고려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권력을 행사한 여성정치가였으며, 우리 역사에서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명”이라고 평가했다.

#비운의 여인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의 후비 순비는 격동기에 왕실 여성이 감내하기도 했던 처절한 삶을 살았다. 할아버지 노책은 공민왕이 친원세력을 숙청할 당시 처단됐다. 아버지 노진과 형제인 노선 등은 공민왕 시해사건에 연루돼 처형당했다. 왕의 아내가 된 뒤에도 불운은 계속됐다. 1392년 조선 건국세력이 공양왕을 폐위시킬 때 자식들과 함께 추방당했다. 이때 사위들이 모두 죽었다. 남편인 공양왕은 공양군으로 강등된 후 1394년 4월 왕자들과 교살당했다. 순비가 이때 함께 죽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공민왕 등극 이후 조선 건국까지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치열한 정치적 격동기로 꼽힌다. 이 시절 순비는 아버지부터 자식까지 모두 살해당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왕실 여성들이 입었던 의복.
세계일보 자료사진
#든든한 조력자

고려 태조와 조선 세조는 당대의 2인자였다가 최고 권력에 올랐다. 지존의 자리에 오를 때 아내의 설득과 도움이 큰 역할을 한 공통점도 가졌다. 신혜왕후는 왕건의 첫번째 부인이다. 그녀는 918년 6월14일 왕건이 홍유, 배현경, 복지겸 등과 궁예를 폐위한 뒤 왕위에 오르는 문제를 논의하다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자 남편을 격려해 갑옷을 가져다주는 기개를 보였다. 세조의 부인인 정희왕후 역시 왕자 시절 남편이 계유정난(1453년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등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은 사건)의 날짜까지 정해 놓고도 동생인 안평대군을 경계해 망설이자 직접 갑옷을 입히며 일을 진행하도록 했다. 그녀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수렴청정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성종 즉위 후 6년3개월간 한명회 등 정승들과 손잡고 조선의 정치를 이끌었다.

책은 연구가 부족한 한국 여성사의 한 분야로서 의미 있는 성과다. 일반 독자들도 사극 등에 등장하는 여성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참고서로 유용할 듯하다. 집필을 이끈 한국학중앙연구원 김창겸 수석연구원은 “인류 역사의 절반은 당연히 여성의 몫이어야 하지만 기록 자체가 워낙 적어 연구가 부족했다. 사료를 뒤져 여성을 주체로 하는 글로 재구성했다”며 “드라마, 소설 등에 등장하는 여성의 삶을 진실과 창작으로 구분해 즐길 수 있는 자료도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가령 최근 드라마 ‘화정’의 주요 인물 중 하나인 정명공주에 대해서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선조의 장녀이나 광해군이 즉위 한 후…(어머니) 인목왕후와 함께 폐서인되어 서궁에 유폐되었다. 인조반정으로 어머니 인목왕후는 대왕대비가 되었으며, 공주도 복권되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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