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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자기만의 책 판별법 있어… 첫문장의 강렬함에 푹 빠져 있죠"

입력 : 2015-07-23 20:33:37 수정 : 2015-07-23 20:3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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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첫문장' 펴낸 헌책방 주인 윤성근씨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혀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가 세 걸음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롤. 리. 타.”

혀끝이 입천장을 따라 걷는다. 세 걸음만 걸으면 앞니에 도달한다. 따라 해보라. 롤-리-타. 발음하는 것만으로 절박하면서도 황홀한 시적 감흥을 체험할 수 있다. 러시아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 ‘롤리타’를 시작하는 문장이다. 나보코프는 이 소설을 러시아에서는 출판하지 못하고 1955년 파리에서 초판을 냈다가 유럽 전체가 술렁거리자 언론에 해명 글을 발표했고 미국에서도 3년 뒤에나 출판이 가능했다. 국내에도 4편의 해설이 붙어 출간된 책이다. 단지 ‘야한 책’이 아닌, 주인공 험버트의 고독한 내면을 보여주는 ‘예술이라는 피난처’라고 쓴 사람은 윤성근(40)씨다. 평론가도 아니고 작가도 아닌, 많이 읽는 독자 대표격인 윤씨가 최근 펴낸 ‘내가 사랑한 첫문장’(마이)에 소개된 내용이다. 그가 좋아하는 첫문장을 담은 동서양 소설 23편을 말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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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읽은 책만을 서가에 꽂아 헌책방을 운영하는 윤성근씨.

“삶에는 마치 나병처럼 고독 속에서 서서히 영혼을 잠식하는 상처가 있다.”

이란 출신 소설가 사다크 헤다야트(1903∼1951)의 소설 ‘눈먼 부엉이’의 첫 문장이다. 숙소에서 가스를 틀어놓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가 죽은 지 반세기가 지났어도 조국에서는 여전히 그를 용납하지 않는다. 윤씨는 “헤다야트에게 조국의 현실은 영혼을 병들게 하는 상처였다”면서 그에게 “삶이란 ‘죽음이 나직하게 노래를’ 불러주기까지 그대로 지니고 살아야 할 고통에 지나지 않았다”고 썼다.

윤씨는 독서광이고 자신이 읽은 책들만 파는 헌책방 주인이다. 그곳 서울 응암동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에는 5000권이 넘는 책들이 꽂혀 있다. 헌책방에 오는 사람들은 신간을 파는 서점에 가는 이들과 달리 주인과 책에 대해 말을 나누고 싶어 한다. 그러자니 자신이 읽지 않은 책을 꽂아두기가 불편했을 것이다.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아이티 분야에서 10여년 일하다, 건전지 같은 삶을 참지 못하고 어린시절부터 탐독해온 책읽기의 세계로 돌아와 7년 전부터 책 속에서 마음껏 유영하는 중이다.

윤씨는 ‘첫 문장 증후군’에 자유롭지 못하며 책을 많이 읽다 보면 누구나 자기만의 책 판별법을 가지게 된다고 말한다. 그는 “내 기준에서 좋은 첫 문장은 우선 미스터리한 느낌”이어야 하고 “소설 속 주인공이 약간은 중2병 같은 분위기를 풍겨야 재밌다”고 썼다. 그가 말하는 ‘중2병’ 증상은 “첫째, 나는 대단한 사람이고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게 없지만 사회가 나를 억압하고 있다는 강한 믿음이요 둘째, 무모할 정도로 자의식이 강하며 셋째, 남들이 쉽게 내뱉지 못한 멋진 말을 자주 하며 넷째, 어느 곳에 가든지 구석자리에서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는 걸 은근히 즐기는 것”이라고 정리한다. 종합하면 ‘허세를 좀 부린다’는 얘기라는데, 어깨에 힘주지 않는 친근한 눈높이의 관찰이다. 그가 최고로 뽑는 허세는 ‘날개’의 주인공인데 이상의 이 소설 첫 문장은 유명한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였다.

평론가의 권위를 빌리지 않고도 독자의 눈높이에서 진정성을 담아 소개하는 책과 소감이니, 올여름 휴가에 앞서 섭렵할 만한 책이다. 이 책에서 소개한 첫 문장 중 어느 하나라도 소설을 좋아하는 당신을 사로잡을 수 있다면, 올여름 휴가는 범상치 않을 것이다. 이 첫 문장은 어떤가.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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