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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솥은 왕권의 상징"…동북아 3국의 부엌 문화 비교

입력 : 2015-05-14 11:18:21 수정 : 2015-05-14 11: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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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숟가락 놨다.” 죽음을 속되게 이를 때 우리가 흔히 쓰는 표현이다. 중국에서는 자식을 얻으면 아기를 잘 키운 집의 밥그릇과 젓가락를 훔쳐오는 풍습이 있다. 그것으로 자식을 먹이면 그 집처럼 잘 자란다고 생각한다. 일본에서는 젓가락에 갓난아기의 혼령을 부르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백일에 베푸는 ‘첫 젓가락질’도 영혼을 이승으로 부르는 의례다.

한국, 중국, 일본의 민속에는 생사, 건강과 장수를 수저와 연결짓는 비슷한 인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음식을 떠먹는 수저를 생명과 건강의 상징으로 여겼던 것이다. 흔하게 접하는 물건에 옛 사람들이 느끼고 깨우친 슬기가 담겼다. 김광언 인하대 명예교수는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잘 들여다보면 삶과 죽음,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의 자취가 드러나는 것은 물론, 우주의 오묘한 진리까지 깨칠 수 있다”고 단언한다. 그가 낸 ‘동아시아의 부엌: 민속학이 드러낸 옛 부엌의 자취’는 부엌과 그 안의 각종 기물을 통해 3국의 비슷하면서도 다른 인식 체계를 들여다 보는 책이다. 각국의 고고학 성과를 담았고 현지 조사 자료와 신화, 민담, 문학작품 등을 모았다. 
중국 윈난성의 이족이 ‘제화절’(祭火節·2월3일)에 마을 신목에 제사를 올린 다음 통나무를 비벼서 일으킨 불을 나누어주고 있다. 눌와 제공.

부엌에서의 각종 조리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인 불씨를 중국에서는 때에 맞추어 바꿔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 유학의 경전 중 하나인 ‘주례’에는 “네 계절마다 나라의 불씨를 바꾸어 때에 따라 번지는 돌림병을 막는다”는 기사가 있다. 본가의 화덕에서 불을 꺼내 새 화로에 담은 뒤 분가한 집으로 들어갔다는 내몽골 자치구의 풍습은 비슷한 맥락이다. 한국에서는 ‘며느리의 책임’과 강하게 결부시켰다. 화로는 시어머니에게서 며느리로 대를 이어 전해졌고, 살림을 나는 날에는 맏아들이 화로와 함께 새 집에 먼저 들어가기도 했다. 김 교수는 “1990년대 대도시에서조차 이사 때 옛집에서 쓰던 연탄불을 꺼뜨리지 않고 트럭에 실어 날랐다”며 “불을 두고 떠나면 먼저 집에서 누리던 복을 버리는 것으로 여긴 탓”이라고 설명했다. 일본에서는 한 해의 마지막 날인 섣달그믐날 신사나 큰 절에서 큰 불을 일으켜 신을 맞았는 데, 이를 ‘해넘이 불’ 혹은 ‘복화(福火)’라 불렀다. 이 불의 연기를 타고 신이 내려온다며 집으로 가져가서 화덕의 불씨로 삼는다. 교토시에서는 야사카 신사에서 불을 받아 설음식을 끓이면 한 해가 무사태평하다고 여긴다. 
경운궁(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에 서 있는 솥의 모습. 한국, 중국, 일본에서 솥은 종종 왕권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왔다. 눌와 제공.

조리도구의 대표격인 솥에는 제법 묵직한 의미가 담겨 있다. 솥은 왕권과 나라의 상징이었다. 중국에는 황제가 둘레에 용과 온갖 동물을 새긴 높이 한 길 세 치에, 곡식 열 섬이 더 들어가는 큰 솥을 구워 하늘의 신과 백성들을 모아 잔치를 벌였다는 신화가 전한다. 솥이 권력의 향배와 관련되었기 때문에 신분에 따라 솥을 늘어놓고 음식을 먹는 수가 제한돼 있었다. 천자는 9개의 솥을 사용할 수 있었고, 제후는 7개, 대부(大夫)는 5개만 가능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궁궐의 정전에 놓인 솥이 이런 특성을 가장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경복궁의 근정전, 경운궁(덕수궁)의 중화전 좌우에 놓인 솥은 왕권을 나타냄과 동시에 백성의 태평을 하늘에 빌기 위한 것이었다. 경운궁의 솥은 구름, 빗방울, 벼 이삭 등을 몸통에 새겼고, 다리는 무시무시한 모습을 한 신령스런 짐승으로 표현했다. 김 교수는 “이 솥들이 조회 때 향을 사른 향로라는 설도 있지만, 크기나 형태, 중국의 보기를 떠올리면 왕권을 상징하는 솥으로 보는 것이 더 그럴 듯하다”고 밝혔다. ‘동몽선습’에 조선의 건국을 “조선왕조가 한양에 솥을 놓았다”고 표현한 것도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일본에서는 솥은 신의 뜻을 캐는 물건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솥을 받드는 신사가 전국에 10여개 소가 넘는 데 이 중 시마네현의 이즈모신사에 딸린 ‘한조신사’는 한국에서 건너간 솥을 모신다. 솥은 형벌의 도구로도 인식되었는데, 일본의 가스카 신사에는 사람들을 지옥의 큰 가마솥에 찌는 장면이 담긴 기록이 전한다. 솥 속의 사람들은 현세에서 저지른 악업 때문에 영원히 솥에서 나오지 못한다.

책은 이외에도 한·중·일 3국에서 전하는 조왕, 그릇, 박, 화덕 등의 민속학적 의미를 비교하고 설명한다. 김 교수는 “(해당 물건에) 깃든 뜻을 캐고 새겨서 어떤 것이 어떻게 같고 다른가를 살폈다”며 “한자를 쓰는 같은 문화권에서 말은 달라도 적은 글자만 익히면 간단한 의사를 주고받는다. 세 나라 문화는 한 그루에서 피어난 꽃”이라고 서문에 적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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