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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트제도·비폭력저항… 간디와 대립한 인물 통해 인도독립 역사·쟁점 분석

입력 : 2015-05-02 03:20:05 수정 : 2015-05-02 03: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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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금표 지음/그린비/2만원
간디와 맞선 사람들/박금표 지음/그린비/2만원

1932년 9월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는 곡기를 끊었다. 영국 정부에 “불가촉천민 분리선거제를 철회하지 않으면 죽음에 이르는 단식을 감행할 것”이라고 통보한 뒤였다. 분리선거제는 인도 최하층인 불가촉천민이 힘을 가지려면 꼭 필요한 제도였다. 불가촉천민이 받는 억압과 차별은 극심했다. 1936년 17세 소년이 불가촉천민용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구타당해 숨질 정도였다. 이런 시대에 간디가 약자의 지위 향상에 반대했다니 의외로 다가온다.

‘비폭력’을 실천한 간디는 성스러운 위인처럼 다뤄진다. 그의 모든 행보는 고귀하고 이상적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현실 속 간디는 평화운동가이자 정치가였다. 저자는 동시대에 간디와 갈등한 인물들을 불러낸다. 이들이 대립각을 세운 지점을 조목조목 분석해, 평면적 위인이 아닌 시대의 모순 속에서 숨 쉬고 저항한 간디를 그린다.

먼저 소환된 이는 브힘라오 암베드카르다. 암베드카르는 평생 불가촉천민 해방운동에 헌신했다. 영국 정부에 분리선거권을 강력하게 주장한 이도 그였다. 그러나 간디가 단식에 나서자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간디가 숨지면 불가촉천민은 크나큰 보복에 시달릴 게 뻔했다.

카스트제도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각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부유하게 자란 간디는 인도가 아닌 남아프리카공화국에 가서야 차별을 경험했다. 그러기에 간디는 인도 촌락이 힘든 건 영국의 지배와 산업화 때문이라 여겼다. “(카스트·종교 갈등 등) 모든 문제는 우리가 나라의 주인이 되면 아주 쉽게 해결될 것”이라고 순수하게 바라봤다.

암베드카르는 불가촉천민으로 자랐다. 학창 시절 우물·화장실 사용이 금지됐다. 친구도 사귈 수 없었다. 그에게 인도의 전통 촌락은 차별과 억압의 온상이었다. 그는 불가촉천민의 권리는 직접 쟁취해야 한다고 여겼고, 카스트 철폐를 주장했다. 그는 간디가 속한 국민회의가 불가촉천민 차별 철폐에 관심이 없음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암베드카르 외에도 비폭력 운동을 가장 강력히 비판한 수브하스 찬드라 보세, 파키스탄 분리독립에 가장 큰 역할을 한 무함마드 알리 진나, 힌두근본주의자 비나야크 다모다르 사바르카르를 통해 간디와 국민회의가 저지른 실책과 부주의가 소개된다. 그러나 이 책의 의도는 간디의 허물 들춰내기가 아니다. 저자는 “대립이 존재하는 세계가 바로 현실이고, 대립하는 존재들로 인해 진리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 않은가”라고 묻는다. 간디 역시 대립했던 인물들을 통해 진리를 깊이 고민할 수 있었으리라 추측한다. 폭력이 있어야 비폭력이 있고, 갈등이 있어야 타협이 있듯이 말이다. 실제 간디는 ‘분리선거제 단식’ 이후 불가촉천민 문제에 달라진 태도를 보인다.

송은아 기자 se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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