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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진의청심청담] 창조경제의 완성은 창조문화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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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3-30 21:17:01 수정 : 2015-03-30 21: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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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철학·기술 베껴선 선진국 요원
창조력 키울 ‘한국적 인문학’ 배양을
정부는 지금 ‘창조경제’를 부르짖고 있다. 경제가 그만큼 중요한 것은 새삼 주장할 일은 아니지만, 경제 앞에 ‘창조’라는 수식어를 굳이 붙이는 이유는 이제 한국 경제도 남의 선진기술을 조합하거나 베끼는 것으로는 현재의 위치를 고수할 수 없다는 절박감에서 나온 말이다. 그렇다, 창조가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

그렇다면 창조라는 것이 부르짖는다고 되는 일인가. 창조야말로 부르짖는다거나 주장되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저절로 창조가 되도록 사회적 분위기와 문화가 무르익을 때, 즉 문화능력이 갖추어졌을 때에 달성되는 것이다. 창조경제는 결과적으로 달성되어야 하는 것이지 앞서서 명교적(名敎的)으로 주장에 그친다면 구두선에 불과하다.

현재 한국 문화를 총량적으로 보면 기업과 과학 분야에서는 차라리 선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업은 지금 세계시장과의 경쟁에서 나름대로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다하고 있고, 세계적 위치(지위)를 점하고 있다.

과학도 기초과학이 좀 부진하긴 하지만 세계 특허 시장에서 나름대로 선전하는 것을 보면 조금만 더 정신 차리면 선진국을 따라잡을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창조력과 상상력을 어릴 적부터 젊은이들에게 배양하는 견인차 역할을 해야 할 인문학이 아직도 사대와 식민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한국의 인문학에는 아직 주체가 없다. 여기서 주체성이라는 것은 민족주의나 국수주의가 아니다. 세계적 지평에서도 자신의 중심을 잡을 수 있는 힘을 말한다. 말하자면 세계와 서로 대화할 수 있는 힘을 말한다.

지금 한국의 인문학은 세계와 대화할 힘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인문학의 선진국들에 배우는 처지에 있거나 그것에 종속되어 있다. 말하자면 학생의 수준에 있다는 말이다. 오늘날 한국의 인문학자들은 대부분 구미학자의 전도사들이다. 자신이 서 있는 토양에서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은 고사하고, 자신의 문제조차 찾지 못하고 있거나 문제를 알았다고 해도 유의미한 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예컨대 조선조에 중국에서 사대하던 문사철(文史哲)의 ‘모화적 인문학’의 전통과 일제 때에 형성된 ‘식민지 인문학’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은 다시 미국과 유럽에 사대하는 인문학이 되었다. 그렇게 ‘사대하는 인문학’이 선진학문을 따라잡는다는 미명 하에 국내적으로 매명(賣名)하면서 주류로 자리 잡고 있다.

문제는 주류 인문학자들이 어렵게 선진학문을 배웠으면 그 다음에는 주체적인 인문학 건설을 위해 노력과 수고를 해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하고,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명리와 부귀를 챙기는 것에만 급급하다는 데 있다. 주체적이고 독자적인 인문학이 없으면 우리의 학술문화예술은 항상 남의 눈에, 시간적으로 과거에, 공간적으로 남의 나라에 매달려 있게 된다.

언젠가는 구미 선진학문의 굴레를 벗어나서 그것을 추월하고 초월해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 할 것인데 그러한 용기도 부족하고, 수고도 하지 않으려는 게 문제이다. 숫제 ‘사대와 식민’으로 사는 게 편안하다는 태도이다. 개중에는 사대와 식민이 객관과 실증이라고 생각하는 부류도 있다. 이것이 바로 한국 문화가 현재적 사대식민에 있다는 증거가 된다. 아직도 동양철학은 주자(朱子)를 성역으로 섬기고 있고, 서양 철학자들은 저마다 자신이 전공한 철학자를 자신의 신주처럼 모시고 있다. 이제 한국도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쳐서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고 있고, 이러한 때에 한국의 독자적인 인문학, 즉 철학과 문화예술의 성립은 무엇보다도 시대적 요청이다. 한때 경제적으로 세계 10위권에 도달한 남미의 아르헨티나가 선진국의 문턱에서 좌절한 것은 역시 독자적인 자기 철학의 수립에 실패한 까닭이다.

한국의 근대사는 참으로 역동성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근대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민족적 노력은 불행하게도 동족상잔의 6·25전쟁을 불러왔고, 결국 오늘의 남북대치 상황의 분단국으로 현재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동안 수많은 혼선과 시행착오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고, 이제 통일을 앞두고 있다.

이제 통일에 앞서 제 목소리를 내는 인문학이 절실하다. 삼국통일의 철학사상적 밑바탕이 된 것이 원효의 ‘화쟁(和諍)사상’이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박정진 객원논설위원·문화평론가
오늘의 ‘통일사상’도 실은 주체적인 인문학의 발전이나 성과 없이는 결코 성립될 수 없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남의 철학이나 사상으로 통일이 달성된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오산이다. 이는 한반도 분단의 당사자들로 구성된 ‘4자회담’이 한국의 통일을 보장하거나 궁극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기제가 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신화나 종교, 철학 등 문화의 상부구조나 형이상학이 서양에 매여 있으면 결국 후진국의 문화는 자신의 역사적 전통이나 자연환경과 유리된 채 상부구조와 하부구조가 서로 따로 놀 수밖에 없고, 결과적으로 주체적이고 힘 있는 문화를 운영하기 어렵다. 문화의 운영에서도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고, 남의 문화를 모방하거나 베끼기에 급급할 수밖에 없다.

한국 문화가 독자적이고 독립적인 창조가 잘 되지 않는 것은 오랜 사대와 식민지 문화의 폐습으로 인한 것이다. 독자적인 철학이나 사관의 정립을 위해서는 한국 문화가 총력적 집중과 선택을 잘 해야 한다. 자생철학이라는 것은 다름 아닌, 결국 스스로 생각하는 ‘국민적 힘’에서 솟아나는 것이다.

선진국들도 달성하지 못한 첫 여성 대통령을 뽑은 국민답게 창조경제를 외치는 대통령의 소리에 전 국민은 화답해야 한다. 강 건너 불보기 식으로 세월을 보내다가는 기회를 잃고 위기를 맞을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사생결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사생결단의 노력을 하는 가운데 남북통일도 이루어질 것이다.

박정진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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