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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하는 사회] "오너가 까라면 까야지" 침묵의 벽에 막힌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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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1-19 20:04:24 수정 : 2015-01-22 20:4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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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 보느라 하고 싶은 말 못해"
“오너가 하는 말에 거역하는 겁니까?” 지난해 국내 한 대기업 임원을 지내다 퇴직한 A씨는 수년 전 임원회의에서 들은 상사의 이 한마디가 아직까지 뇌리에 남아있다. 신상품 출시가 안건으로 오른 이 회의에서 오너를 통해 지시가 내려왔다. 해외 유학 중이던 재벌 3세가 외국에서 접한 상품과 유사한 제품을 출시하라는 것이었다. 마케팅 분야에서 오랜 경력을 쌓았던 A씨는 이 상품이 경쟁력이 없을 것으로 보고 반대 의사를 개진했다. 하지만 회의장 분위기는 냉랭하기만 했다. 당시 전무급 인사는 “오너가 하라는 것을 안 하겠다는 것이냐”는 취지로 A씨를 몰아붙였다. A씨는 “‘오너’라는 말이 나온 뒤 회의장에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며 “결국 어떻게 해서든 사업을 추진했고, 결과는 좋지 않았다. 책임은 오너 일가가 아닌 아래 직원들에게 지워졌다”며 한숨을 쉬었다.


◆오너가 소통의 최대 장애

‘열린 마음으로 소통을 하는 인재’,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타인의 의견을 듣는 사람’.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신입사원 채용 홈페이지를 통해 내놓는 ‘인재상’에서 빠지지 않는 표현들이다. 모든 기업이 소통하고 이를 통해 창의적 발상을 내놓는 인재를 선호한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기업 간부들이 말하는 기업문화의 현주소는 이러한 인재상과는 거리가 멀다.

오너 일가의 ‘제왕적 리더십’, 소위 ‘까라면 까라’식의 경영문화에 빠져든 회사에서 구성원들은 위기가 몰려와도 침묵하게 된다. 기업에 갓 입사한 신입사원들은 상명하복 문화에 창의력을 꺾인 채 말만 잘 듣는 침묵형 인재로 변하기 십상이다.

지난해 대기업에 입사한 신입사원들은 회사 생활에서 오는 답답합을 호소했다.

무역회사에 입사한 B(29)씨는 아침 회의시간을 ‘경청의 시간’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동료가 의견을 내면 팀장이나 부장이 ‘그런 얘기는 왜 하나’라며 면박을 준다”며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는데, 말을 했다간 오히려 한소리 듣게 되기 때문에 자연스레 입을 닫게 된다”고 털어놨다. 대기업에 입사한 C(30)씨는 “토 달지 말고 하라는 대로 하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고 전했다. C씨는 “하루에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네 알겠습니다’”라며 “회사에 가면 답답한 기분이 들어 자주 바깥으로 몰래 나가게 된다”고 말했다.

입사 6년차인 D씨에게 회사는 소통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다. 그는 “처음에 답답한 느낌이 들어 회사를 그만둘까 생각도 했지만 다른 회사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두 비슷하다는 걸 느꼈다”며 “소통이 잘되고 있는 회사는 손가락 안에 꼽을 것”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직장 내 만연한 ‘침묵’ 고질병


직장 내 만연한 ‘침묵의 문화’가 도마에 오르곤 하지만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취업포털 잡코리아는 지난해 8월 직장인 304명을 대상으로 ‘직장 내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다. 그 결과 직원들 간의 소통 부족이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직장 내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한지’에 대해 물은 결과 절반이 넘는 60.9%가 원활하지 않다고 답했다. 그 이유로는 ‘수직적인 조직문화’가 48.1%로 가장 많았다. ‘서로 의견을 잘 이야기하지 않아서’(27.0%), 사내 이슈가 잘 공유되지 않아서(14.1%), 개인 업무가 많아서(9.7%), 미팅·회의 부족(1.1%)이 뒤를 이었다.

같은 해 상반기 취업포털 ‘커리어’의 설문조사 결과 역시 기업에 만연한 ‘침묵 문화’를 보여준다. 당시 직장인 651명을 대상으로 스트레스에 관해 설문조사를 한 결과 56.9%가 ‘눈치를 보느라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한다’고 답했다. 2013년 취업포털 ‘사람인’이 직장인 559명을 대상으로 ‘직장인으로서 가장 부러운 행동’을 설문조사한 결과 32.4%가 ‘하고 싶은 말을 참지 않고 다 하는 것’이라고 응답했다.

◆위기로 치닫게 하는 조직문화

전문가들은 침묵으로 일관하는 한국의 기업문화가 군대에서 출발했다고 지적한다. 군대식 문화에 물든 상사들이 이 문화를 자연스레 새로 들어온 사원들에게 강요하면서 상명하복식 문화가 굳어진다는 얘기다.

미국의 취업정보 사이트 ‘글래스도어’는 한국 대기업의 문화를 ‘군대식문화’라고 평가했다. 글래스도어는 “일부 한국의 대기업 조직 문화는 열정이 넘치지만 군대 스타일”이라며 “가족이 아파도 퇴근을 못 하고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소리지르는 일이 다반사이며, 무례하고 폭력적인 면이 있다”고 묘사했다. 그러면서도 글래스도어는 한국 대기업 문화에 대해 “한다면 하는 문화가 좋다고 느낀다”고 총평했다.

정학범 조직 커뮤니케이션 연구소 소장은 “상하관계가 고착화하면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할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된다“며 “상사와 부하 간의 신뢰 회복을 통한 소통이 절실한 상태”라고 진단했다.

정선형·이지수 기자 linear@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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