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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엔 등창의 원인이 독한 술과 지나친 성생활이라는데…

입력 : 2014-12-12 19:25:00 수정 : 2014-12-12 19: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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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생활 사나이’ 문종은 억울하다
이상곤 지음/사이언스북스/1만7000원
왕의 한의학/이상곤 지음/사이언스북스/1만7000원


1452년 5월, 어의 전순의는 임금 문종의 등에 난 종기를 따내 농즙을 짜냈다. 2홉, 지금의 단위로 하면 360㏄의 엄청난 양이었다. 어의는 치료 결과가 나쁘지 않다고 보고했으나 같은 달 14일 문종은 세상을 떠났다. 39세, 젊은 나이였다.

동의보감에는 문종의 목숨을 앗아간 ‘등창’의 원인으로 ‘독한 술’, ‘기름진 음식’, ‘지나친 성생활’을 꼽는다. 하지만 문종은 그런 생활습관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아버지 세종을 닮은 그는 ‘바른생활 사나이’였고, 대체로 건강했다. 그렇다면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 건 언제였을까.

조선왕조실록을 찬찬히 살펴보면 부왕, 모후의 죽음 이후다. 그는 “만사를 제쳐놓고 상제를 행하여도 3년 안에 병에 걸림을 면하는 것이 어렵다”고 하는 3년상을 예법에 맞춰 성실히 치렀다. 아내와 두 번의 생이별, 한 번의 사별을 한 불행한 가정사도 병의 원인이 됐다.

첫 번째 부인은 문종의 사랑을 얻겠다고 궁중에서는 금지된 주술 행위를 하다가 내쫓겼고, 두 번째 부인은 동성애를 벌이다 발각됐다. 세 번째 부인은 아들을 낳고 다음 날 죽었다. 세 번이나 홀아비가 된 문종이 느꼈을 심적인 고통과 답답함, 여기서 비롯된 화가 종기로 분출된 것은 아니었을까.

왕조 국가 조선에서 왕의 죽음은 한 개인의 죽음으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왕을 정점으로 구성된 사회였기 때문이다. 문종의 죽음은 수양대군(훗날의 세조)이 어린 조카 단종, 당대의 권신 김종서 등을 죽이고 정권을 찬탈한 ‘계유정난’으로 이어졌다. 왕의 건강이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사례다. 저자는 “왕의 몸과 병에서 조선 당대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 구조와 문화와 시대정신까지 읽어낼 수 있다”고 단언한다. “정치적, 경제적 사건이 시대정신의 변화는 조선 왕의 몸과 마음에 흔적을 남겼기” 때문에 “왕의 몸은 바로 조선 역사의 바로미터”가 된다는 것이다. 

조선 왕조에서 왕실 구성원, 특히 왕의 건강은 국가의 정세를 좌우하는 요소였기 때문에 엄격하게 관리되었다. 1879년 12월 차기 왕인 세자가 천연두에 걸렸다 회복되자 고종은 신하들의 축하를 받고, 사면령을 내리며 기뻐했다. 사진은 당시의 축하 의식을 그린 그린 병풍.
문종의 죽음을 단초로 자신의 시대를 연 세조는 ‘절륜한 힘’이 자랑인 건강 체질이었다. 하지만 재위 10년부터 질병에 시달리기 시작하고, 50세가 되는 재위 12년부터 심각해졌다.

세조의 치료기록으로 유일하게 전하는 내용은 재위 12년 10월, 내의원에서 ‘칠기탕’(七氣湯)을 올린 것이다. 칠기란 “기뻐하고 성내고 생각하고 근심하고 놀라고 무서워하는 것들을” 말한다.

저자는 “칠기탕 처방으로 보아 세조의 수명을 단축시킨 질환은 걱정과 두려움으로 인한 마음의 병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겉으로는 강한 척하고 거침이 없었으나 어린 조카와 수많은 신하들을 죽였던 계유정난으로 생긴 마음 속의 공포와 번민이 건강을 해치는 싹이 됐다는 해석이다. 저자는 “칠기탕 처방과 세조의 깊은 불교 숭상은 절대 권력자의 마음 속을 엿보는 창일지도 모른다. 그는 속으로 근심하고 놀라고 무서워했을 것이다. 자신이 해 온 일들을 말이다”라고 적었다. 

대한제국기 황제의 건강을 관리했던 태의원의 기록. 날짜와 날씨, 태의원에서 행한 문안, 대화내용, 처방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역사는 사실의 수집이며, 그에 바탕한 해석이다. 이 말은 어떤 관점을 가지느냐에 따라 역사는 다양한 풍경을 펼쳐보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의사인 저자가 왕의 몸을 통해 읽어낸 조선의 역사는 충분히 흥미롭다.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었던 세종은 질병 앞에서 ‘성군’이라기 보다는 범부와 다름없었고, 사도세자의 광증과 영조의 편집증은 ‘임오화변’(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굶겨죽인 사건)으로 이어졌다. 다만 “정조의 등에 난 종기는 결국 19세기라는 세계사적 대전환기에 조선 왕조의 대응 능력을 결정적으로 앗아갔다”는 식으로 왕의 존재로 역사를 규정하는 듯한 관점에는 유의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왕조 시대라 해도 당대의 정치, 사회, 경제 등의 상황을 종합해야 제대로 된 역사 읽기가 가능해서다. 왕의 건강을 다룬 최고의 의학적 지식을 접하는 재미를 주는 책이기도 하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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