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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포럼] 인문학 열풍, 인문학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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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10-15 21:36:38 수정 : 2014-10-15 21:3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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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기업·사회서 대중화 활발하지만 대학에선 고사 위기…
학문적 토대 없이는 한계 가질 수밖에
지난주 말 삼성그룹 공채 시험은 상반기보다 한국사 비중이 커지고 난이도도 높아졌다고 한다. 철학과 세계사를 혼용한 문제도 나왔다. 중세 철학자들 이름을 나열한 뒤 활동 시기를 묻는 식이다. 현대차그룹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역사 에세이를 출제했다. 대기업들이 신입사원을 뽑을 때 역사 등 인문학적 소양을 중시하는 경향이 반영된 것이다. 응시생들은 진땀을 뺐을 것이다. 하지만 회사원들이 전공분야 지식에다 인문학적 역량까지 갖추는 건 반갑고 바람직한 일이다.

대기업들이 입사 시험에 인문학 문항을 도입한 이유는 뭘까. 우리 사회가 몇 년 전부터 인문학으로 시선을 돌리게 된 것과 관련이 있다. 스티브 잡스가 촉발한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사회적 흐름으로 확산하면서 대기업 채용 시스템에까지 영항을 미쳤다. “애플 기술은 인문학과 결합돼 있다”는 잡스 발언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대기업의 사내 교육에는 인문학이 이미 기본 항목이 됐다.

원재연 논설위원
박근혜정부도 인문학 바람에 한몫을 했다. 국정 기조인 문화융성의 근간을 인문학으로 설정해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인 문화융성위원회 산하에 인문정신문화특별위원회를 설치했다. 박 대통령도 기회 있을 때마다 인문학적 소양과 상상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지난 8월 문화융성위 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는 “인문 교육은 군내 가혹행위와 인권 유린, 학교폭력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한 근본 방안 중 하나”라고 했다.

정부와 기업, 시민에 이르기까지 인문학은 전에 없이 각광받고 있다. 인문학 르네상스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인문학 관련 서적 발행이 크게 늘고, 베스트셀러의 상당수를 차지했다. 대중을 상대로 한 역사와 철학 강연이 우후죽순 생기고 방송에서도 인문학 관련 프로그램이 잇따라 신설됐다. 인문학자가 대중 스타 반열에 오르기도 한다. 요즘 한 풀 꺾인 느낌이 없지 않지만 ‘인문학 열풍’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문·사·철로 대표되는 인문학은 삶에 대한 새로운 통찰과 지혜를 제공하는 학문이다. 물질주의의 만연과 극심한 경쟁, 양극화 심화로 신음하는 우리 사회를 치유하는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다. 인문학적 상상력과 창의력은 나라와 기업의 행로에 나침반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문학의 대중화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돌아볼 게 있다. 우리 사회의 인문학 열풍과는 달리 대학의 인문학이 황폐화하는 현실이다. 대학경쟁력 제고를 명분으로 학과 통폐합 바람이 불면서 주로 취업이 여의치 않은 인문학 관련 학과들은 날벼락을 맞고 있다. 최근 5년 동안 전국 4년제 대학 인문학 관련 학과 수백개가 폐지됐다는 통계도 있다. 인문학의 학문적 토대가 돼야 할 대학의 인문학이 구조조정으로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여간 우려스러운 일이 아니다.

인문학 열풍과 위기가 공존하는 역설적 상황을 어떻게 봐야 하나. 한편에선 인문학을 기능적이고 보조적인 수단으로 여겨 박수를 보내고, 다른 한편에선 쓸모없는 탁상공론으로 인식해 홀대하는 것은 아닌지.

대학이라고 사회·경제적 여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인문학 관련 학과 구조조정이 시장원리에 따른 것이라는 주장에도 일리가 없지는 않다. 잡화점식 대학 운영은 문제다. 정부에 인문학 육성과 지원을 요구하기에 앞서 인문학계의 자성과 변화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렇더라도 대학의 취업 학원화가 가속화하는 현실은 씁쓸하다. 고등교육의 근간을 허물고 대학 존재 의미를 퇴색시키는 건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또 한번 노벨상 계절이 지나갔다. 해마다 이맘때면 노벨상 수상을 남의 잔치로 구경만 하는 우리 처지를 되돌아보게 된다. 인문학과 기초 과학을 경시하는 사회 풍토 탓도 있지 않을까. 실용적 잣대만으로 기초 학문을 평가해서는 곤란하다. 인문학 대중화도 필요하지만 인문학 자체를 복원하는 일이 시급하다. 학문적 토대가 없는 인문학 대중화는 경박하고 공허하다. 인문학을 바로 세우기 위해 정부와 대학 당국, 인문학계가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원재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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