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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단풍이 곱게 익어가는 시월의 가을이었다. 곤히 잠든 조선의 새벽을 깨운 것은 일본군과 낭인의 무리였다. 야수들은 얼굴을 가린 채 사다리를 타고 경복궁 담을 기어올랐다. 칼을 휘두르며 삽시간에 궐내 북쪽 건청궁으로 내달았다.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 막아서자 권총으로 참살했다. 고종의 멱살을 잡고 구석으로 내동댕이쳤다. 울부짖는 세자는 상투를 잡아 질질 끌고 다녔다.

야수들의 목표는 ‘여우사냥’의 암호명이 붙은 명성황후였다. 이들은 궐내에 숨어 있던 명성황후를 찾아내 잔인하게 살해했다. 서너 번 칼질을 한 뒤 옷을 벗기고 시신에 불을 질렀다. 흩어진 유골은 근처 숲에 몰래 묻었다. 119년 전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난 일본 만행의 실상이다.

야수들은 범행에 앞서 흥선대원군이 있던 공덕동 별장으로 쳐들어가 조선 병사들의 옷을 벗겨 갈아입었다. 대원군을 강제로 교자에 태워 들러리로 세웠다. 왕실 내부의 권력다툼으로 위장하려는 얕은 술수였다.

하지만 이들의 만행을 똑똑히 지켜본 ‘진실의 눈’이 있었다. 궁궐 안에 있던 미국인 시위대 고문관 다이 장군과 러시아 건축기사였다. 사건 발생 100년 후에 발견된 일본도의 칼집엔 ‘순식간에 여우를 해치우다’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조선에 파견된 일본 관리가 본국에 보낸 문서에도 ‘석유를 뿌려 불을 지르니 필설로 형언하기 어려운 잔인함이라…’는 구절이 들어 있다. 그런데도 일본은 한사코 범행을 부인한다. 사건 다음날 주한 외교사절들의 항의가 빗발치자 미우라 고로 일본 공사는 “조선 훈련대 병사들이 한 짓이지, 우리는 모르는 일이오”라고 발뺌했다.

일본의 기억상실증은 고질인 듯싶다. 이제는 세계가 다 아는 일본군위안부 강제동원 사실까지 부인한다. 최근엔 ‘10대 소녀까지 강제로 위안부로 만들었다’는 내용이 담긴 외무성 홈페이지 글까지 삭제했다고 한다. 일본의 양심을 깨우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수요집회는 내일로 1148회째를 맞는다. 그들의 반성에 얼마의 시간이 더 필요한 걸까.

일본이 아무리 기록을 지운다고 해도 역사의 진실은 바뀌지 않는다. 조선의 황후가 시해되던 날, 서울 하늘에는 먼동이 트고 있었다. 설마 그 태양마저 손바닥으로 가릴 셈인가. ‘태양의 나라’ 일본의 모습이 너무 추하지 않은가.

배연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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