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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술상 삼아… 파도를 말벗 삼아… 소주 한 사발 들이켜다

입력 : 2014-08-25 21:23:11 수정 : 2014-08-25 21: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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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의 나마스테!] ‘내 술상 위의 자산어보’ 펴낸 소설가 한창훈 소설가 한창훈(51)을 거문도에 내려가 만나고 왔다. 사실 진즉부터 거문도에 내려가겠다고 그에게 청하다가 두어 번 퇴짜를 맞은 꼴이었다. 세월호 사태가 터져 예약했던 청해진해운 데모크라시호 운항이 정지되는 바람에, 또 한 번은 그가 육지에 있다는 이유로 무산됐다. 예전에 벗들이랑 거문도로 그를 만나러 갈 때는 용산역에서 무궁화호 마지막 심야 열차를 타고 새벽에 여수에 내려 시장통에서 해장국과 잎새주를 곁들이던 낭만이 있었다. 이젠 고속열차를 타니 세 시간 남짓이면 항구에 도착하고 다시 초쾌속선으로 두 시간여 만에 거문도에 도착한다.

제아무리 먼 곳이라도 테크놀로지가 장악한 세상에 더 이상 물리적 변방은 없다. 육지와 5000㎞ 떨어진 인도양 복판에서도 그렇고 북극도 마찬가지다. 인도양에서는 위성과 수직으로 연결돼 인터넷이 육지보다 더 잘 터지고 북극은 지리적 특성상 위성 사이를 물이 가로막아 조금 더 느릴 따름이다. 문제는 기술이 발달해도 외로움은 어찌해 볼 수 없다는 데 있다. 이제 진정한 변방은 ‘마음의 오지’에만 있다.

해 저무는 거문도 해변의 소설가 한창훈. 그는 “이 아름다운 바다에 그렇게 아름다운 아이들을 수장시켜버린 사람들을 생각할 때마다 주먹에 힘이 들어가고 이가 갈린다”고 산문집 서문에 썼다.
이번에 그를 만나러 내려간 명분은 최근 출간한 ‘내 술상 위의 자산어보’(문학동네)였다. 바다에서 나는 물고기와 해초를 자신의 세밀한 체험과 맛본 경험을 바탕으로 흥미롭게 엮어냈던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의 후속편으로 낸 책이다. 작심하고 바다와의 인연과 그간 아껴둔 소재를 모두 풀어 바친 밀도가 높은 책이다. 이를테면 첫머리에 배치한 ‘팔경호’ 이야기는 그가 오랫동안 아껴두었던 단편 소재다. ‘죽음과 마주하여 소주 한 사발’이 그것이다.

팔경호는 육지로 여객선은 물론 화물선조차 다니지 않던 시절 거문도 단위조합이 소유한 대표적인 운송수단이었다. 이 배로 마을 사내들이 추석을 앞두고 육지에 수산물을 팔고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러 떠났다가 태풍 사라호를 만났다. 이들이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배와 물건을 포기하지 않고 거문도를 향해 돌아오던 중 실종돼 다 죽은 줄 알고 장사를 지내는데 대마도까지 흘러갔다가 기사회생해 돌아온 전설적인 이야기다. 그대로 바다로 나가면 다 죽을 줄 알면서도 선장의 지시에 따라 막소주 한 사발씩 돌려 마시고 바다로 향하는 장면을 한창훈은 이렇게 묘사했다.

“붉어진 얼굴을 하고 다들 제자리로 돌아갔다. 선장은 직접 키를 잡았다. 그리고 사라호가 도착해버린, 죽음의 연회장이 되어 있는 밤바다를 향해 배를 몰았다. 바다의 생활이란, 이렇게 파도와 파도 사이의 골짜기를 무덤으로 삼는 이들의 모습, 그것이었다.”

이 산문집에는 이 이야기를 필두로 그가 살고 있는 거문도 이야기와 대양과 북극까지 항해했던 체험기가 눅진한 문장으로 차지게 실려 있다. 그가 사는 ‘해발 1m의 집’은 서도의 유림해수욕장 곁에 있었다. 귀신이 나오는 집이라 하여 후배가 질겁하는 바람에 용케 구한 공간이었다. 거문항에서 밤에 한창훈의 오토바이 뒤에 타고 고도와 서도를 연결하는 삼호교를 건너 왔다. 오토바이 뒤에서 듬직한 남자의 등판을 잡고 거문도의 바닷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느낌은 잎새주보다 짜릿했다.

오후에 거문항에 배가 도착할 때 한창훈이 여객선 터미널로 마중나왔다. 그를 따라간 곳은 ‘거문슈퍼’ 앞이었다. 이 슈퍼 앞에는 옆으로 길게 놓인 의자가 있었는데, 한창훈은 가타부타 아무 말 없이 그곳에 걸터앉아 옆자리에 앉은 슈퍼 주인 형과 느리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 형 김무환(56)씨는 이번 산문집에 사진을 찍어준 사람이었다. 홍익대 대학원에서 사진을 공부하고 스튜디오까지 운영하다가 거문도로 내려와 가업을 이은 지 20여년째라고 했다. 두 사람은 2년 전 연안 낚시가 가능한 작은 동력선 ‘동성호’도 함께 구입했다. 조용하고 부드러운 분위기가 서로 닮은 두 사람은 이 섬에서 서로 많이 의존하는 가족 같은 느낌이었다.

 한창훈은 거문도에서 태어나 열 살 때 섬을 떠났다. 대부분 고향에 대해서 애증을 가지게 마련인데 그는 어린 시절 떠났기 때문에 ‘애’밖에 없다고 말한다.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낚시하고 조개 잡던 그 즐거운 기억만 안고 고향을 등졌으니 유토피아로 남을 수밖에 없다. 유년의 성장기에는 밭 몇 이랑과 바다가 세상의 전부라고 알고 살았으니 바다는 그의 원체험에 새겨진 어머니 자궁 속 양수 같은 존재일 것이다. 바다에 대한 그의 애정은 곡진하고 깊다. 데뷔 이래 첫 소설집 ‘바다가 아름다운 이유’를 필두로 바다와 바닷가 사람들의 애환을 깊이 그려내 명실공히 한국 최고의 문장가 반열에 서 있는 힘이다.

그가 다시 거문도로 돌아온 사연이 애틋하다. 1차 귀향은 1999년에 내려와 2년간 머문 시기였는데, 등대섬이 멀리 보이는 마을 뒤 허름한 집을 찾아 침묵과 대면하며 고독으로 자신을 단련시키던 무렵이었다. 다시 세상에 나아가 작심하고 새로운 삶을 열었고,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국장과 청년위원장을 하면서 세상과 동료 문인들과 교감하는 바쁜 삶을 살았다. 이후 다시 바다로 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지 못해 녹동항까지 와서 살다가 결국 2006년 거문도로 들어왔다. 다시 거문도로 오는 데 시간이 걸렸던 것은 그의 삶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딸 때문이었다. 딸이 부르면 10분 안에 달려갈 공간에 작업실을 두고 늘 달려갈 준비를 하며 살다가 답답하면 무조건 걷는 버릇대로 지금은 눈물의 포구가 된 팽목항까지 걸어 내려왔다고 했다. 처음부터 작정한 것은 아닌데 바다에 막혀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서성거리다 거문도를 떠올렸다. 거문도에 와서도 딸을 만나기 위해 육지 행을 거듭했다. 그 딸이 한국 최고의 명문 예술대에 합격한 뒤에서야 조금 덜해졌다곤 하지만 글을 쓰게 만든 에너지의 핵은 딸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 그리고 바다였던 셈이다. 그는 “왠지 딸을 생각하면 그냥 슬퍼졌다”고 말했다. 그 딸이 중학교 때 백일장에서 입상한 ‘아버지의 바다’가 거문도 유림해변 해발 1m 하얀 집 거실에 액자로 걸려 있었다.

“나에게 있어 아버지를 상징하는 건/ 바이킹의 성지 푸른 바다// 어렸을 적 섬바위에 고개 처박고/ 쏨뱅이 꼬마돔 낚던 어린 시절 못 잊어/ ‘마도로스 한’을 꿈꿔왔던 아버지의 눈엔/ 아직도 내가 아닌, 바다가 어려 있다// 딸 버리고 바다 가면 좋냐고/ 소설 쓰는 작업실마저 섬으로 보내버린 아버지께/ 샐쭉하게 입을 삐죽여 보기도 하지마는/ 어느새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 마음 속 깊이 새겨지는 나의 꿈/ 바다를 그리는 화가// 아버지와 나 사이엔 바다가 있다.”

공동으로 장만한 낚싯배 ‘동성호’를 배경으로 선 ‘거문슈퍼’ 사진작가 김무환(왼쪽)과 한창훈.
밤의 유림해변은 고즈넉했다. 파도가 잔잔하게 찰랑거렸고 물은 맑았다. 서풍이 불면 맑아진다고 했다. 밤바다 너머로 불 밝힌 삼호교와 거문항이 아늑했다. 최진희 노래는 서럽게 들리고 바람은 부드럽게 얼굴을 쓰다듬으며 지나간다. 이런 곳에 오래 살면 마음까지 공간을 닮은 형질로 바뀌지 않을까. 한창훈은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가 너는 욕심이 없어서 잘살기는 글렀다고 했다”면서 “이런 데 사는 사람의 특성은 생각이 없어지는 것인데, 생각의 양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산문집에 “바닷가에 홀로 이러고 있는 모습이 잡혀버린 고기와 크게 다를 바 없어 어쩌면 스며든 게 아니라 포획당했을 수도 있다”면서 “그렇다면 이곳은 아름다운 감옥”이라고 썼다. 이날 밤 그는 특유의 시니컬하지만 느꺼운 어투로 말했다.

“우리는 외로움을 느끼게끔 진화돼 온 존재들 같다. 이런 장치마저 없었다면 인류는 이미 조져버렸을지 모른다.”

글·사진=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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