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스포츠 지도자로 눈을 돌려보면 여권 신장이란 말이 무색하다. 아마추어 종목에선 종종 여자 감독을 볼 수 있지만 프로에서는 먼나라 이야기였다.
여자 프로배구 흥국생명이 ‘벽’을 깼다. 최근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여자배구의 전성기를 이끈 주역 중 하나인 박미희 해설위원을 새 사령탑으로 선임한 것. 명해설가에서 초보 감독으로 변신해 새 시즌 구상에 여념이 없는 박 감독을 8일 경기도 용인의 흥국생명 숙소에서 만났다.
소감부터 물었다. 박 감독은 “우선 책임감이 무거워진 것을 느낀다. 그래도 두려움 따위 버리고 악착같이 해볼 생각”이라고 각오를 다졌다.
사실 박 감독에게 지도자 제의가 온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배구 이전에 엄마 역할은 물론 방송 해설에 애착과 자부심이 있었기에 고사했다. 이번에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지난달 중순 감독 제의를 받은 뒤 심사숙고 끝에 받아들였다. 박 감독은 “새로운 도전과 모험을 해야 할 터닝 포인트가 있다면 지금이다 싶었다. 현역 시절이 인생의 1단계라면 결혼과 출산, 해설이 2단계였다. 그리고 이제 3단계”라고 설명했다.
여자 프로배구 여자 사령탑은 박 감독이 처음은 아니다. 선배인 조혜정 감독이 2010∼11시즌 GS칼텍스를 지도한 바 있다. 그러나 성적부진으로 감독직을 더 이어가지 못했다. 박 감독은 “조혜정 감독님과 통화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라. 꼭 한 번은 해볼 만한 일’이라며 북돋아 주셨다”면서 “조 감독님께 감사하다. 먼저 포문을 열어주셨기에 오늘의 나도 있을 수 있었다. 반드시 여자 감독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힘주어 말했다.
기대 속에 감독직을 수락하긴 했지만 흥국생명은 2013∼14시즌 꼴찌에 머문 만큼 상황은 좋지 않다. 선수층이 얇은 데다 높이도 낮다. 이러니 저리니 해도 프로 감독의 제1 덕목은 성적이기에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박 감독은 “양면성이 있다.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는 부담이 있지만 한편으론 조금만 잘해도 올라갈 수 있다”면서 “사실 지난 시즌의 흥국생명은 ‘배구계의 히딩크’가 온다 해도 좋은 성적을 내기엔 힘든 선수층이었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도 해설자로서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는 흥국생명과 감독으로 직접 부딪쳐 본 흥국생명은 달랐다며 희망을 이야기했다. “선수들과 상견례하고 일대일 면담을 했다. 선수들 스스로 자신의 문제점을 얘기하는 등 많은 대화를 나눴다. 특히 선수시절 내 주포지션인 센터를 맡고 있는 (김)혜진이는 ‘이제 난 죽었다’며 우는 시늉을 하더라. 오고 간 대화 속에서 희망을 봤다. 그리고 소통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감독으로서 포부를 짧게 부탁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박 감독은 “있는 그대로 해보겠다. 너무 앞서가지도 않고, 너무 두려워하지도 않겠다. 지도자엔 성(性)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며 재미있는 배구를 보여드리겠다”며 웃었다.
용인=남정훈 기자 che@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