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노예 폐지론 불 지핀 스토리텔링의 힘

입력 : 2014-05-09 19:38:20 수정 : 2014-05-09 19:38:20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때로는 세상을 바꾸는 기폭제, 때론 삶의 시뮬레이션이 되는
인간 최고의 생존본능 이야기
조너선 갓셜 지음/노승영 옮김/민음사/2만2000원
스토리텔링 애니멀/조너선 갓셜 지음/노승영 옮김/민음사/2만2000원


프로 레슬링의 핵심은 화려한 ‘가짜 폭력’에 있지 않다. 미국적인 남성, 사내답지 못한 나르시스트, 거드름을 피우는 프로모터 등 사랑스러운 주인공과 혐오스러운 악당 그리고 그들이 펼쳐내는 갈등이 보는 이들을 열광시키거나 분노케 한다. 세계 최대 규모 프로레슬링 단체인 WWE(World Wrestling Entertainment)의 최고경영자 빈스 맥마흔은 자기 스스로 ‘영화’를 만들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다른 스포츠도 단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크게 다르지 않다. ‘이야기’는 스포츠 중계방송의 뼈대다. 올림픽이 시작되면 선수들의 역경과 분투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쫙 깔아놓는다. 마침내 출발 신호가 울리면 우리는 서사시적 전투에서 싸우는 영웅을 대하듯 선수들을 응원한다.

스포츠뿐 아니다. 이야기는 인간 삶의 거의 모든 측면과 맞닿아 있다. 소설, 영화, 드라마는 물론 광고, 뉴스까지 우리가 접하는 다양한 매체가 이야기 형식으로 이뤄져 있다. 사람을 만나서 대화를 나눌 때도 다양한 정보가 왜곡과 과장을 거쳐 이야기 형태로 교환된다. 잠을 잘 땐 꿈을 꾼다. 온전히 기억하지 못할 뿐, 하루 2시간가량 ‘마음의 극장’에서 스스로 각본을 쓰고 연출을 한다.

책은 이 같은 인간의 스토리텔링(Storytelling) 본능을 진화 생물학, 심리학, 신경 과학의 최신 연구를 바탕으로 파헤친다. 재미있는 점은 현실에선 결코 환영받지 못하는 ‘말썽’이 우리를 사로잡는 이야기의 필수 요소라는 점이다. 이야기가 갈등으로 이뤄진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이래로 서사 연구와 스토리텔링 교재의 핵심 원리다. 관객은 영화 속에서 일어난 말썽을 보며 심장이 두근대고 극중 인물이 겪는 끔찍한 수난에 눈을 가릴 것이다. 그러나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대부분 잠이 들 것이다.

여기서 ‘가짜’나 ‘허구’를 특징으로 하는 이야기의 ‘쓸모’를 찾을 수 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항공모함에 비행기를 착륙시키는 고난도 임무를 맡은 조종사가 모의 비행 장치를 이용해 연습하듯, 인간은 이야기로부터 삶에서 맞닥뜨리는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얻는다. 특정 기술을 예행연습할 때 우리의 마음이 실제 반응을 조절하는 신경 회로를 발화(發火)한다는 뇌 과학 연구는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한다.

‘세상 물정 모르는 책벌레’ ‘방 안에 틀어박혀 텔레비전만 보는 외톨이’ 등의 비아냥도 이런 의미에선 틀린 말이 된다. 픽션을 즐겨 읽는 사람이 논픽션을 즐겨 읽는 사람보다 사회성이 뛰어나다는 연구 결과도 나오는데, 픽션이 공감 능력 향상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는 단지 재미와 쾌감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 특히 복잡하고 어려운 인간의 사회적 삶을 헤쳐나가도록 실제로 도움을 준다. 스토리텔링은 결국 인간이 가진 생존의 기술인 것이다.

그 쓸모만큼 이야기는 힘도 세다. 한 심리학 실험에 따르면 이야기에 몰입한 인간의 정보 처리 방식은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감정적 반응을 유도할 뿐 아니라 이성적 사고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공습으로 폐허가 된 영국 홀랜드하우스 도서관에서 런던 시민들이 책을 둘러보고 있다. 이야기는 다른 여가 활동과 달리 어떤 형태로든 누구나 할 수 있으며, 전쟁과 같은 최악의 여건에서도 이야기에 대한 욕망은 멈추지 않는다.
민음사 제공
이 힘은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 19세기 미국에서 성서 다음으로 많이 팔렸다고 알려진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은 노예 제도의 잔학상을 폭로해 미국 북부에서 노예제 폐지론에 불을 붙였다. 노예제를 둘러싸고 일어난 미국 남북전쟁 중에 링컨은 소설의 작가 해리엇 비처 스토우를 만나 “이 거대한 전쟁을 일으킨 책을 쓴 작은 여인”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20세기의 가장 큰 비극인 홀로코스트의 주범인 히틀러가 지녔던 순수 혈통 민족에 대한 그릇된 이상도 바그너의 오페라 ‘리엔치’에 의해 빚어졌다고 한다.

책은 오늘날 게임, 교육, 광고 등에서 위력을 떨치고 있는 스토리텔링의 힘을 다양한 관점에서 분석하고 그 힘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흥미롭고 다양한 사례를 들어 결코 무겁지 않게 설명하고 있다.

김승환 기자 hwan@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한지민 '우아하게'
  • 한지민 '우아하게'
  • 아일릿 원희 '시크한 볼하트'
  • 뉴진스 민지 '반가운 손인사'
  • 최지우 '여신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