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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이 방문할 천주교 내포 성지 탐방…<3>홍주 성지와 해미 성지(끝)

입력 : 2014-04-28 13:33:50 수정 : 2014-04-28 13:3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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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 천주교 신자 참수터.
순교자를 많이 배출한 홍주 성지…때려도 죽지 않자 얼려 죽여

홍주(홍성의 옛 이름) 성지는 홍성군 고암리에 있다. 이곳 역시 ‘내포의 사도’ 이존창에 의해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다. 이곳에서는 기록상으로 212명의 순교자가 나왔다. 무명의 순교자까지 합하면 1000여 명이 순교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순교자 많이 나온 곳으로 알려진다. 그중 4명이 복자품을 받았다.

순교자 원시장(1732~1793)의 경우 포졸들이 때려도 때려도 죽지 않자, 사또가 겁이 나서 한 겨울인데도 밖에 내놓고 계속 몸에 물을 부어 얼어 죽게 했다고 한다. 황일광은 백정이었지만, 양반 신분이었던 신자들로부터 신분 차별 없이 평등한 대우를 받자 “나 같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해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그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돼 매질로 다리가 부러졌으며 끝내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과거 홍주에서는 저자거리에서 신자들이 국수를 먹으면 비신자들이 숙연한 마음으로 바라봤다고 한다.

홍주 천주교 순례길.
홍주는 증거터, 순교터, 매장터 등 3곳이 함께 있는 성지다. 이곳을 연결하는 천주교순례길(내포문화숲길)이 잘 조성돼 있다. 2012년 복원된 홍주 감옥(구 검찰지청) 앞에 ‘증거터’라는 표지석이 있다. 천주교 박해 기간 홍주 감옥으로 끌려온 신자들은 갖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 굳게 신앙을 증거한 뒤, 이곳에서 순교의 길로 나아갔다. 홍성군청 뒤로 홍주 목사의 동헌이 보존돼 있고, 그 뒤에 ‘신앙증거터’ 표지판이 있다. 동헌에서는 주로 천주교 우두머리들에게 문초와 형벌이 가해졌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신앙을 지켜 형리들이 녹초가 되는 등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순례길을 따라 가다 보면 홍주 북문밖 월계천변으로 이어진다. 월계천을 따라 참수터, 생매장터 등 표지판이 서 있다. 참수터는 황일광이 참수형을 당했고, 많은 신자들이 고결한 피를  흘렸던 곳이다. 참수터를 지나면 월계천과 홍성천이 만나는 합수머리 근처에 생매장터가 나오는데,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생매장이라는 잔인한 형벌이 자행됐던 곳이다. 즉, 1866년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 최법상, 김조이, 원 아나타시아 등이 이 형벌로 목숨을 잃었다. 이들은 구덩이에 들어가 머리 위로 쏟아지는 흙덩이를 받으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순교의 길을 걸어갔다.

월계천변 생매장터 옆에는 성당처럼 제대가 마련된 축구장만한 잔디 광장이 있다. 홍주 성지에는 따로 기념성당이 지어져 있지 않고 이곳에서 기념 미사를 드린다고 한다. 일종의 야외 성당인 셈이다.

최교성 홍주 성지 담당신부.
홍주 성지를 담당하고 있는 최교성 신부는 “천주교 신자들의 재산을 노린 일부의 탐욕과 지방관들이 조정의 지시 없이 가한 박해(1815년 을해박해)도 있었다”고 지적하며, “생매장터의 경우 천주교 일급 성지지만, 의외로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고 말했다.

 

해미 성지 성당.
무명 순교자의 생매장지 해미 성지…교황, 순교자 묘에 참배 계획

해미 성지가 있는 충남 서산시 해미면은 내포지방의 여러 고을 가운데 유일하게 진영이 있던 군사요충지다. 해미 진영장은 내포 일원의 해안 수비를 명분 삼아 독자적인 처형 권한을 갖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서해안 일대에서 붙잡힌 천주교 신자를 처형했다. 사대부들은 충청감사가 있는 공주나 홍주 진영으로 이송됐고, 이곳에서 죽어간 이들은 이름 없는 서민들이었다. 해미에서는 1790년대부터 100년 동안 천주교 신자 3000여 명이 국사범으로 몰려 처형됐다.

해미 생매장 순교자 묘.
성지에는 지명마다 슬픈 역사가 고스란히 간직돼 있다. 서문밖은 1790년대부터 처형장으로 사용했는데, 진둠벙은 병인박해(1866∼1868) 때 해미읍성의 처형장이 넘쳐나자 두 팔이 묶인 신자들을 벌판에 있는 ‘둠벙’(웅덩이의 충청도 사투리)에 마구잡이로 밀어 넣어 생매장한 데서 붙여졌다. 처음에는 ‘죄인둠벙’이었다가 점차 진둠벙으로 불리게 됐다. 여숫골은 순교자들이 생매장터로 끌려가면서 “예수, 마리아!”라고 부르짖던 것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여수(여우) 머리’로 잘못 알아들은 데서 비롯됐다. 지금은 논으로 개간됐지만 병인박해 당시에는 나무가 우거져 ‘숲정이’라 불렸다. 마을사람들이 땅을 일굴 때 수없이 많은 유해가 나왔는데 뼈들이 수직으로 선 채로 발견됐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지금도 둠벙과 유해 발굴터가 남아 있어 당시의 참혹상을 말해준다. 해미에서는 어린이들의 치아도 많이 발굴됐으며, 신자들을 오랏줄로 묶어 곡식 타작하듯 내동댕이쳐 죽였던 돌다리 ‘자리개 돌’도 보존돼 있다. 해미읍성 옥사 안에는 철삿줄로 신자들의 목을 매달아 고문을 하며 처행했던 키 큰 호야나무(회화나무)가 스스로 죄인인양 고개를 떨구고 서 있다.

백성수 해미 성지 성당 주임신부.
백성수 해미성지 담당신부는 “옥사에 끌려 나온 교인들은 읍성의 서문 밖에서 처형당했거나 해미천이 바다와 만나는 끝머리로 끌려가 참수 당했다”며 “산 채로 생매장당한 사람도 많았다”고 전했다.

순교자들의 재판을 했던 읍성의 동헌부터 해미 시내를 거쳐 이곳에 이르는 1.5㎞ 구간에 조성된 ‘십자가의 길’에는 성지순례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예수가 걸었던 이스라엘의 14처를 잇는 길 못지않은 고난의 행로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오는 8월 17일 해미읍성에서 10만여 명이 참가할 것으로 예상되는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 폐막미사 집전에 앞서 해미 성지를 방문해 순교자 묘를 참배하고 기도한다. 한국천주교 관계자들은 아시아 지역 전교에 큰 힘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정성수 종교전문기자 tol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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