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27년간 내리막길… 영화 만들기 위한 훈련의 시간”

입력 : 2014-04-13 20:57:31 수정 : 2014-04-13 20:57:31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영화 ‘시선’으로 돌아온 거장 이장호 감독 ‘거장의 귀환’은 실로 반가운 일이다. 정지영 감독이 ‘부러진 화살’ ‘남영동 1985’ 등의 작품으로 복귀해 현역 감독들을 압도하는 연출력을 발휘하며 펄펄 날아오른 데 이어, 1970∼1980년대 한국 영화의 전설 이장호(69) 감독이 ‘천재선언’(1995) 이후 19년 만에 신작 ‘시선’을 들고 돌아왔다.

그의 데뷔작은 한국 영화사를 새로 쓴 ‘별들의 고향’. 1974년 국도극장에서 단관 개봉한 이 영화는 105일 만에 46만명의 관객을 모았다. 처음으로 30만관객을 넘었던 ‘미워도 다시 한 번’(1967)을 훌쩍 뛰어넘는 대기록이었다. 29살이던 그가 그야말로 자고 일어났더니 스타가 된 것이다. 올해 1월 한국영상자료원은 ‘한국영화 100선’을 선정해 발표했다. 1위의 ‘별들의 고향’을 비롯해 ‘바보 선언’(1983)과 ‘바람 불어 좋은 날’(1980) 등 상위 10위 안에 그의 작품이 무려 3편이나 올랐다. 그러나 인생사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듯, 이 감독은 “지난 27년 동안 내리막길을 걸었다”고 술회했다.

“정신 못 차린 채 술 마시고 바람피우며 방탕한 삶을 살던 제게 벌을 내린 거죠. 제 인생의 내리막길은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한 하나의 훈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저를 광야로 내보내려고 하신 듯합니다.”

그는 1986년 ‘이장호의 외인구단’이 히트한 것을 정점으로 이후 힘든 여정을 걸었다. 이듬해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를 도쿄영화제에 출품할 때는 매너리즘에 사로잡혀 최고작품상을 받을 것으로 자신했다고 한다. 물론 수상에는 실패했다. 같은 해 교통사고까지 일어나면서 집은 경매에 넘어갔다. 이후 ‘명자 아끼꼬 쏘냐’ ‘핸드백 속의 이야기’ 등 7편을 연출·제작했지만 줄줄이 흥행에 참패했다.

“‘별들의 고향’이 4월에 개봉했어요. ‘시선’도 4월에 개봉(17일)하는군요. 오랫동안 영화에 갈증을 느꼈는데, 잘 안 됐어요. 기회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완성하고 관객에게 선보인다는 게 정말 기쁜데 한편으로는 어리둥절하기도 해요. 아직 실감이 안 나고. 내가 언제 쉬었나 싶기도 하고. 슬럼프를 겪는다는 것은 물론 고통스럽지요. 나는 추락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전성기로 올라서는 것을 지켜보는 거예요. 샘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느긋하게 지낼 수도 없는 거죠. 절망하면서 수치심도 느꼈어요. 내 영화인생이 여기서 끝난다고 생각하니, 배우들이 자살하는 심정을 이해할 것도 같더군요.”

19년 만에 영화계에 복귀한 이장호 감독은 “내 욕심을 위한 영화 말고, 관객들과 세상에 좋은 영향을 주는 영화, ‘생명’을 주제로 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데뷔 40년을 맞은 그의 스무 번째 영화 ‘시선’은 가상 국가 이스마르로 해외 선교활동을 떠난 한국인들이 무장단체에 피랍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순교와 배교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약한 마음을 섬세하게 그렸다. 포르투갈 선교사의 인간적 고뇌를 담은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을 읽고 감동을 받아 2007년부터 구상했다.

“사실 이 영화도 기획부터 수없는 진통을 겪었어요. 영화진흥위원회 마스터 지원 프로젝트가 있는데 해외 영화제 수상 감독의 시나리오를 심사해 제작비를 지원하는 겁니다. 마침 ‘시선’의 시나리오가 좋은 점수를 받았죠. 그런데 부결됐어요. ‘감독이 노령이어서 실현될 가능성이 없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결국 행정 소송을 벌였고 3년이 걸려 승소했어요.”

고비가 있었지만 진통은 유익한 결과를 낳기도 했다. 3년 동안 시나리오의 결점을 보완하고 여러 사람의 고견을 담아 다듬기를 반복한 것이다.

“그 일 이후로 더는 늙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어요. 하하하.”

두어 해 전까지만 해도 팔씨름으로 쉰한 살 때 얻은 고3 아들을 이길 만큼의 강골에다, 에너지 넘치는 그는 ‘힘이 들기로 유명한’ 색소폰 연주도 수준급이다.

“슬럼프에 빠졌을 때 오히려 큰 것을 얻어 낼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슬럼프는 자신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능력을 개발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어 주기도 합니다.”

그는 “나이 든 감독들이 다시 활발하게 창작할 시기가 곧 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상업적 흥행 영화 말고 감독의 생각이 많이 들어간 영화, 그러면서도 제작비가 적게 드는 영화를 만드는 데는 노장들이 적격이예요. 젊은 감독들은 이미 대기업 자본논리에 적응한 탓에 자신의 원칙을 내세우며 작업하기란 사실 불가능합니다. 주요 관객인 젊은층만을 노리고 쉽게 안타 칠 수 있는, 돈으로 돈 먹기 식의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우리(노장) 체질에 안 맞아요. 결국 제작사로부터 낙점받기보다는 독립 프로덕션을 꾸려서 영화를 만들어야겠지만. 이두용 감독에게 좋은 소재를 맡기면 여태까지 농익은 실력을 발휘하지 않을까 싶어요. 배창호 감독도 마찬가지고….”

차기작은 베트남 보트피플을 구해준 한 선장의 이야기를 담은 ‘96.5’. “여섯 번 수정한 시나리오가 나왔다”며 ‘노장의 힘’을 보여주겠단다. 이 감독은 제작 공백기 동안 영화계를 떠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울영상위원회 위원장,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집행위원장, 전주대 영상예술학부 교수 등으로 바쁘게 살았다.

글·사진=김신성 기자 sskim65@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트리플에스 지우 '매력적인 눈빛'
  • 트리플에스 지우 '매력적인 눈빛'
  • (여자)이이들 미연 '순백의 여신'
  • 전소니 '따뜻한 미소'
  • 천우희 '매력적인 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