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은 결국 대출이 낀 위험한 ‘깡통’ 전세를 기웃거리다 거리로 내몰리기 십상이다. 정부 대책이 겉도는 사이 위험에 내몰린 세입자들의 현실이다. 전문가들은 더 이상 ‘땜질처방’만으로는 효과가 없다고 입을 모았다. 임대시장의 근본적 변화에 따른 대처가 시급하며, 가격부양과 매매활성화 등 시장기능에 기댄 정책만 남발되는 사이 외면당한 세입자들의 주거권 보호가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가구형태와 계층별 맞춤식 주거권 보호와 전월세제도의 투명성 확대, 세입자 보증금 보호장치 강화도 시급한 과제로 꼽혔다.
◆길거리 내몰리는 위험세입자군 ‘비상’
가계부실 여파로 아파트 경매가 늘면서 세입자 불안이 가중되고 있다. 가장 시급한 것은 경매로 집이 넘어가더라도 세입자가 원래 계약한 거주 기간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점이다.
현행 주택임대차보호법은 경매시 기존 임대차 계약이 자동종료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임대기간 중 주인이 집을 팔아도 기존 임대차 계약은 유지되는데 유독 경매 때만 계약이 소멸한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는 “경매 역시 일반 대중을 상대로 매매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계약 자동소멸 조항은 형평성에 어긋나는 셈”이라며 “주거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정책적 대의를 위해서라도 원칙적으로 임대차 계약을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보증금 문제도 심각하다. 세입자에게 전세금은 단순한 돈 이상 의미다. 대부분 전세금이 전 재산이거나 , ‘전재산+빚(대출)’인 경우도 많아 개인 신용 문제까지 걸려 있다. 그런데도 현 보증금 보호책은 현실과 동떨어져 유명무실한 상태다. 예컨대 개인의 보증금에 앞서 국세, 채권 등의 앞순위 변제 항목이 너무 많다.
최창우 전국세입자협회 대표는 “국세 우선 원칙에 따라 집주인이 밀린 각종 세금 등을 지방자치단체와 정부기관 등이 고지서 발부일, 지방세 신고일을 기준으로 계산하다가 가장 먼저 떼가고, 집주인이 ‘사장님’이라도 되는 날엔 체납임금에 퇴직금까지 각종 임금채권이 우선 변제되고 나니 세입자의 전세금은 남는 게 없다”며 “피해를 보는 세입자 입장에선 국가가 주거권을 파괴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세입자 알권리도 보장되지 않고 있다. 집 주인은 추가 대출이나 채무 발생 등 집을 둘러싼 상황 변화를 세입자에게 고지할 의무가 없고, 세입자는 이런 상태에서 영문도 모르고 보증금을 떼이는 경우가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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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 주거권 보호는 알권리 확보에서 시작한다. 대부분의 선진국은 임대료의 합리적 규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세입자가 계약에 앞서 투명한 임대료정보를 공급받는 것을 당연시한다. 박은철 서울연구원 연구위원은 “영국 런던 임대료 지도가 공개되고 독일 표준임대료 일람표가 발표되는 것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세입자들이 월세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사진은 영국 정부에서 운영하는 런던의 임대료 지도 사이트 첫 화면. 런던 ‘렌트맵’ 홈페이지 캡처 |
전문가들은 전세의 월세전환추세에 발맞춘 다양한 가구 형태와 세대별, 계층별 주거권 보호책 마련도 시급하다. 시장에서는 월세가격의 투명한 정보공개와 저소득 가계 부담을 덜기 위한 월세금 보조제도, 정기 소득이 없어 전세가 절실한 노인을 위한 공공임대주택 확대 등이 대안으로 거론된다.
정부가 뒤늦게 대책을 내놓았지만 우려는 여전하다. 국토교통부는 월세보조 제도인 주택바우처를 오는 10월 시행할 예정이고 7일부터 기업형 주택임대관리업도 도입한다. 박기정 한국감정원 연구위원은 “주택임대관리업이 시행되면 민간임대업자가 세입자에게 전세를 주고 집주인에게 월세처럼 일정수익을 지급하는 것도 가능한 만큼 전세 수요 공급 불일치 문제를 해소할 가능성이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하지만 박은철 서울연구원 연구위원은 “주택임대관리업, 주택 바우처 제도의 경우 도입 필요성에도, 자칫 임대료 상승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시행과 동시에 부작용을 어떻게 줄일지 철저한 대비와 세밀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주거권을 외면해온 역사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소액 주택임차인 보증금 보호한도의 경우 현실에 맞게 재조정해야 한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왔지만 18대 국회에서 관련법안은 낮잠만 자다 자동폐기되는 바람에 지난해 19대 국회에 다시 제출됐다. 현재 서울의 경우 보증금 7500만원 이하 세입자만 집이 경매에 넘어갔을 때 2500만원까지 우선 변제를 받고 있다. 전세가가 매매가 턱밑까지 치고 올라온 시대적 변화를 전혀 반영하지 않은 금액이다. 경매주택 세입자의 주거권과 직결되는 통합도산법 개정안의 경우는 전세가 고공행진이 시작된 2009년에 이미 법무부 안이 만들어졌지만 부처 협의를 핑계로 미뤄지다 사라졌다.
◆월세시대에 대비해야
정부가 임대시장의 구조 변화를 직시하고 이에 대한 큰 틀의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월세 시대를 맞아 아파트 매매 활성화와 이에 따른 경기 부양에 초점이 맞춰졌던 부동산 정책의 ‘대수술’이 필요한 시점이란 얘기다.
지금까지 정부대책은 매매활성화를 통한 시장 자체 조정에 매달리는 땜질 처방에 급급했다. 다주택자가 여분의 집을 전세로 내놓으면 세금을 깎아주거나 전세가 고공행진에 고통받는 세입자에게 집을 사거나 보증금에 보태라고 대출을 권하는 방식이다. 한 부동산 전문가는 “환자의 병을 고치지는 않고 모르핀만 주사해온 것”이라고 비판했다. 1∼2인 가구 급증에 따른 임대 형태 변화와 이에 따른 세제 개편 등도 뒤따라야 한다. 소인 가구가 많이 거주하는 오피스텔은 주택법상 주택이 아니다. 또 업무용 오피스텔 매입자는 주택에 비해 많은 세금을 문다. 주택은 매매시 취득세와 등록세를 합해 2.3% 정도의 세금을 부담하면 되지만 오피스텔은 4.6%에 육박한다. 이들은 지난해 말 시작된 취득세 영구인하 혜택에서도 제외됐다. 집 주인이 오피스텔을 살 때 낸 세금을 과도한 보증금과 월세로 회수하려는 이유다.
특별기획취재팀 investigativ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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