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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완식의 미술살롱] 畵法에서 벗어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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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12-27 21:33:00 수정 : 2014-05-30 17: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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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수단에 불과해 얽매이면 그림 안돼
화법 논쟁뿐인 사회‘그림같은 삶’ 멀어져
오랜만에 화실에 들렀다. 그림을 처음 배우던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유화와 수채화를 배울 때 흔히 듣던 얘기가 있다. “유화와 수묵화는 어두운 색에서 시작해 가장 나중에 밝은 색으로 마무리를 하라. 수채화는 그 반대로 밝은 색으로부터 시작해라.” 유화 물감과 수채화 물감, 수묵의 성질을 고려한 그림 그리기 방법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림을 익힐 때의 이야기다. 프로작가로 작업을 하면서는 학생시절에 배웠던 화법들을 하나하나 내려놓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른바 법으로 들어가 법으로 나오는 통과의례를 거치는 것이다. 화법 자체로부터의 자유다. 작가가 나름의 조형세계를 구축하려면 화법에 얽매이면 안 된다. 화법은 어디까지나 강을 건너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강을 건너서도 배를 짊어지고 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저 높은 고지의 조형세계를 위해 발걸음을 옮기는 데에 배는 버거운 짐이 될 뿐이다.

그림에 대한 장황설을 늘어놓는 이유가 있다. 요즘 우리 사회가 너무 ‘화법’에만 매달려 있지 않나 해서다. 나름의 조형세계, 즉 ‘국가 그림’이 사라진 느낌마저 든다. 주변 열강은 나름의 그림을 그리려고 혈안인데 화법 논쟁만 벌이며 날만 새우니 우리 그림은 언제 그리려나 조바심마저 든다.

화실에서 캔버스 대신 책을 펼쳤다. 1981년부터 1988년까지 프랑스 사회당 미테랑 정부에서 제3세계 자문역을 지낸 레지 드브레가 쓴 ‘지식인의 종말’이란 책이다. 지식인 대신 한국 정치지도자를 대입해 보니 궁합이 어찌도 그리 딱 맞는지 의아스러울 정도다.

그의 일갈을 들어보자. 깊이 사고하고 여론을 올바르게 이끄는 것이 아니라 그럴듯하게 포장된 단견(短見)과 억견(臆見)을 쏟아놓으며 매스컴에 얼굴을 들이밀어 이름이나 알리고, 언론에 영합해 여론 조작에 관여할 뿐이다. 지식인의 전형적 종말적 행태이자 한국 정치지도자들의 모습은 아닐까.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책장을 넘기고 넘겼다. 이런 대목이 다시 눈길을 멈추게 한다. 자신들 속에 갇혀 대중과 단절된 ‘집단자폐증’,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고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하는 ‘현실감 상실증’. 그러면서도 여전히 사회의 모럴을 선도한다고 자만하는 ‘도덕적 자아도취증’, 들어맞지도 않는 예측을 쏟아놓는 ‘만성적 예측 불능증’, 자신의 이름이 자칫 잊혀질까 봐 매스컴의 리듬에 맞추어 설익은 견해들을 유창한 언변으로 늘어놓는 ‘순간적인 임기응변증’ 등등이다. 때마침 화실 한편에 놓인 TV에서 정치권 뉴스가 쏟아져 나온다. 영락없는 그 모습이다.

레지 드브레의 독설을 더 따라가 보자. 과거의 지식인은 시대를 명료하게 해석해 주었지만, 지금의 지식인은 시대의 어둠에 어둠을 더할 뿐이다. 과거의 지식인은 미래를 내다보는 견자(見者)였지만, 지금의 지식인은 거미처럼 사방에 발을 뻗치며 주목을 받지만 현실과는 동떨어진 사람이라 우리가 이 시대를 이해하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이제 그런 지식인에게서 해방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대한민국 국민들은 그런 정치인에게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레지 드브레는 언론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한다. 훌륭한 작가는 일반적인 내용을 최대한 줄이면서 구체적으로 글을 쓴다. 정수를 전달하기 위해서 불필요한 향기를 줄인다. 문학적 글은 건조제에 비유된다. 쓸데없는 물기를 건조시킴으로써 생명력을 갖는다. 그러나 지식인의 글은 축축하다. 그런데 언론이 그 축축한 것에 물감을 더한다. 따라서 생명력이 없을 것은 당연하다. 괜히 참고자료를 덧붙이면서 사건을 부풀린다.

캔버스 앞에 다시 앉았다. 지난날 미대 입시생들의 조잘거림이 가득했던 화실이 그리워진다. 그림에 대한 강평과 화법이 맞았느니 틀렸느니 하는 아우성이 가득했다. 아마추어들이기에 풋풋한 향기였다. 프로 작가들이 그랬다면 다툼의 소음공해였을 것이다. 캔버스에 그림 대신 붓을 들어 글을 써 내려갔다. 새해엔 아마추어 한국정치판이여 영원히 안녕!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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