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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질서는 ‘약자들의 보호막’
준법의지 있어야 아름다움 완성
높은 하늘이 위풍당당히 쪽빛을 뽐내던 어느 날이었다. 서울 서초동의 법정 건물에는 중앙에 커다란 계단이 있다. 뉴스나 드라마의 배경으로 종종 나오는 곳이다. 재판을 마치고 그 중앙계단으로 내려오는데 내 눈에 플래카드 속의 문구 하나가 하늘보다도 먼저 눈에 띄었다. ‘법원과 함께 하는 인문학 강의 제0편, 법과 예술.’

보자마자 실소를 지었다. 법과 예술이라니 도대체 무슨 조화란 말인가. 보나마나 법정 드라마나 법정 영화 몇 개 늘어놓고 법과 예술이라고 주장하겠지. 강연 듣고 온 사람 중 절반은 뭔가 문화생활을 했다는 뿌듯함을 안고 나올 테고, 나머지 반은 법과 예술이라는 게 이런 건가 하고 갸우뚱하며 나오겠지. 바로 이렇게 나는 ‘법과 예술’이라는 테마를 한껏 비웃었다. 내 눈에 그 문구가 띄었던 이유는 이 같은 불협화음 때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저녁 퇴근길 강변북로에서 이촌동으로 들어선 후 병원 앞을 지나는데 횡단보도의 파란색 불이 켜졌다. 당연히 횡단보도 정지선을 지키기 위해 멈춰 섰다. 구부러진 등에 주름 가득한 얼굴의 한 노인이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몇 해 전 돌아가신 할머니와 비슷한 모습을 한 그 노인은 낡은 유모차에 몸을 의지한 채 횡단보도를 천천히 지나가셨다. 아주 천천히.

아름다웠다. 그저 앞만 보고 질주하던 승용차가 성인 손바닥 크기의 신호등에 맞춰 멈춰서고, 꼬부라진 노인 한 분이 어린아이보다도 느린 걸음으로 횡단보도를 지나갔다. 그렇게 세상의 속도가 별안간 느려졌다.

이 아름다운 장면은 곧이어 초등학교 앞을 지날 때에도 또다시 반복됐다. 신호에 맞춰 많은 차가 섰고, 초등학생 아이들은 한손에 떡꼬치, 핫도그 등의 간식을 든 채 친구와 삼삼오오 횡단보도를 건넜다. 아이들이 지나갈 때까지 차는 모두 움직이지 않았다.

만일 그곳에 횡단보도가 없다면 아니 있어도 신호등이 없다면 어떠했을까. 더 이상 성성한 머리카락에서 흑모를 찾을래야 찾을 수도 없고, 유모차 없이는 발걸음 하나도 떼기 힘든 그 노인은 차마 길을 건너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도 마찬가지다. 이제 막 초등학교에 들어간 키 작은 아이들은 제때 길을 건너지 못했을 것이다.

임윤선 변호사
왜냐하면 그들이 약자이기 때문이다. 교통에서 보행자, 특히 운동능력이 떨어지는 노인과 아이들은 철저히 약자이다. 그들이 쌩쌩 달리는 차 앞에서 무슨 수로 신속히 이동하겠는가. 심지어 판례는 자동차를 ‘위험한 물건’ 또는 ‘흉기’로 정의내리고 있다. 감히 대들 수 없는 대상인 것이다, 도로에서 자동차란.

그래서 법이나 질서가 필요한 것이다. 바로 어린아이나 노인 같은 약자가 안전하게 제때에 길을 건너게끔 하기 위해 말이다. 도로교통법령은 차와 사람으로 하여금 신호를 준수하고, 횡단보도에서는 보행자를 우선으로 함으로써 약자도 안전하게 길을 건너게 해준다.

이것이 바로 법과 질서의 역할이다. 약육강식 및 승자독식이 되기 십상인 사회에서 조금 힘이 부족하고, 경제력이 낮아도 기본적인 권리를 영위할 수 있도록 보호막이 돼 주는 것, 그렇게 세상의 속도를 조금 늦추게끔 하는 것, 법의 아름다움은 바로 여기에 있다. 법정 영화나 법정 드라마가 아니라 바로 이렇게 일상에서 말이다. 법이 약하고 어려운 사람을 보호하는 데 앞장설수록 그 아름다움은 배가 될 것이다.

하지만 종국적으로 그 아름다움을 완성시키는 것은 결국 사람의 의지라는 생각도 든다. 법과 질서가 잠재적 약자인 나의 보호막임을 인지하고 나 자신부터 법과 질서를 지키려는 의지, 그 의지가 바로 법을 일상의 예술로 승화시켜주는 것 아닐까.

임윤선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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