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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84〉 한글

입력 : 2013-11-14 22:34:32 수정 : 2013-11-15 10:3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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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의 법칙처럼 자명한 세종대왕의 위대함

유년시절, 우리에게는 외우라는 것이 참으로 많기도 했다. 힘겹게 구구단을 외우는 중에 어느 날 갑자기 건조하고 의미를 알 수 없는 A4용지 반 쪽 분량의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라 해서 무척 고생했다. 또 새마을정신을 외우고 새마을 노래를 외워야 했고, ‘국기에 대한 맹세’도 틈나는 대로 외워야 했다.

강요된 것 중에는 역사적 영웅에 대한 존경심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영웅이 우리 민족을 국난에서 구해준 ‘성웅 이순신 장군’과 우리에게 한글을 선사한 ‘성군 세종대왕’이었다. 곳곳에 동상이 세워지고 교실의 앞과 뒤 벽에, 어떤 근거로 그렸는지 알 수 없는 그분들의 ‘표준 영정’이 아무런 표정도 없이 걸려 있었다. 약간의 반감을 가지고, 아주 습관적으로 우리는 그분들을 존경했다.

많은 세월이 지나고 그런 강요에서 조금 자유로워졌을 때, 그분들을 내 스스로의 의지로 찬찬히 보게 되었다.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그분들의 위대함에 감탄하게 되었다. 물론 그게 그거 아니냐,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내게 어린 시절의 이상한 강요는 위대한 분들과 나 사이에 놓인 거대한 장애물이었다.

세종대왕은 위대하다. 그것은 굳이 내가 말을 하지 않아도 마치 자연의 법칙처럼 자명한 것이지만, 위대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느낌이 들 정도이다. 조선 초기에 조선의 왕들에게는 이중적인 유전자가 있었다. 한 갈래는 태조, 태종 등이 가졌던 무인의 기질이고 또 한 갈래는 세종, 문종, 안평대군 등의 지식인적 기질이다. 무인의 혈기 방장함을 가진 사람들은 태조 이성계로부터 비롯하여 태조의 다섯 번째 아들이며 태조의 건국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 훗날 태종이 된 이방원과, 이방원의 큰아들이며 활쏘기를 즐기고 활달한 성격으로 다양한 사고를 치고 다녔다는 양녕대군, 그리고 세종의 둘째 아들이며 호방한 기질을 가지고 있었으나 동생 안평대군에게 늘 밀리다가 결국 조카인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를 찬탈해 훗날 세조가 된 수양대군 등을 들 수 있다.

물론 조선이라는 나라가 사대부라는 새로운 계급의 마스터플랜 하에서 건국하여 내내 약한 왕권을 유지했던 한계가 있었지만 문인 기질과 무인 기질의 왕들이 번갈아 왕위를 이으며 나름대로는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나라로 자리를 잡아나가고 있었다. 더군다나 귀족의 국가였던 고려와는 대조적으로 조선의 문화는 다분히 서민적인 면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고려시대의 청자와 조선시대의 백자를 들 수 있다. 간혹 조선의 건축과 조각에서 고려시대나 그 전 시대의 화려함이 없어진 것에 대해, 그것은 우리나라의 국운이 조선시대에 점점 쇠락해지는 방증인 양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그런 시각은 조선시대의 문화에 대한 무지의 소치이거나 “그런 지경이었으므로 우리가 구원했었네” 하는 식민지사관의 잔재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조선은 그렇게 만만한 나라는 아니었다. 당쟁을 이야기하고 그로 인한 분열로 나라가 약해졌다고 하는데 그런 분파와 경쟁에 의한 정치적 장치는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도 있었고, 그로 인한 여러 가지 정치적 혼란은 오히려 변증법적 역사 발전의 한 동력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조선이라는 나라는 왕의 절대적 권력으로 운영되는 시스템이 아니었고 사대부와 관료 등 나라를 이끄는 여러 무리의 지식인 그룹이 견제를 통해 조절하는 나라였다.

1940년 경북 안동에서 발견된 것을 간송 전형필이 구입하여 보존하게 된 훈민정음 서문. 국보 70호
(출처: 문화재청)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읽는 훈민정음의 탄생

더욱 재미있는 것은 조선에는 전 세계에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왕조실록’을 만들어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고 늘 삼가게 하는 독특한 기록문화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왕조실록을 읽고 있다 보면 마치 왕이 말하면서 내뿜는 입김을 맡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만큼 생생하기 그지없다.

“양녕 대군(讓寧大君) 이제(李?)가 졸(卒)하였다. 제는 태종의 맏아들로서(…)성품이 어리석고 곧으며, 살림을 다스리지 아니하고 활쏘기와 사냥으로 오락을 삼았다. 세종이 우애가 지극하였고 제도 또한 다른 마음을 가지지 아니하여 능히 처음부터 끝까지 보전함을 얻었다. 추증하여 시호를 강정(剛靖)이라 하였으니, 굳세고 과감한 것을 강(剛)이라 하고 너그럽고 즐거워하여 제 명대로 편안히 살다 죽은 것을 정(靖)이라 한다.” - ‘양녕대군 졸기’ 중에서

태종이 양녕대군을 폐하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아 바로 왕권을 이양한 것은 그가 행했던 여러 가지 일 중에 가장 큰 치적이었다 할 정도로 후대의 우리로서는 고마운 일이다. 태종이 충녕을 왕조 초기의 국가 기틀을 세울 만한 세자로 정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 마지막에 꼽는 이유도 참 재미있다.

“(…)술을 마시는 것이 비록 무익하나, 중국의 사신을 대하여 주인으로서 한 모금도 능히 마실 수 없다면 어찌 손님을 권하여서 그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겠느냐? 충녕은 비록 술을 잘 마시지 못하나 적당히 마시고 그친다. 또 그 아들 가운데 장대한 놈이 있다. 효령대군은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니, 이것도 또한 불가하다. 충녕대군이 대위(大位)를 맡을 만하니, 나는 충녕으로서 세자를 정하겠다.”

그래도 효령대군은 술 안 마시고 건강 잘 챙겨서 조카 안평대군이 살던 비해당을 넘겨받아 90세가 넘도록 편하게 잘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수양대군이 형 문종이 요절하고 어린 조카 단종이 즉위하자마자 동생 안평대군을 역모로 몰고 결국 조카도 밀어내고 왕이 되는 과정에서, 양녕대군은 왕실의 어른으로서 말리지는 못할망정 단종과 안평대군의 사사를 앞장서서 주장했다 하니, 왕위 계승에서 밀려났던 두 형의 마음 깊은 곳에는 적잖은 앙금이 남아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업적이 너무도 많아 문종 때 세종실록을 편찬하면서 문체를 바꾸어야 할 정도였다는 세종의 치적 중에 가장 감사할 일은 누가 뭐래도 ‘훈민정음’의 창제이다. 조선왕조실록에 훈민정음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세종 25년(1443) 12월30일의 일이다.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

왕이 친히 글자를 지었다는 것과, 이때 이미 ‘언문’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있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언문은 처음에는 한문자(漢文)에 대한 말로서 한글을 통칭한 것이라 하는데, 당시 세종과 한글 제작에 관여한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언문이라 불렀고, 근세에까지 널리 사용됐다. 언서(諺書)·언자(諺字)·언해(諺解) 및 암클·중글 등은 모두 훈민정음을 낮추어 본 데서 나온 말이다.

역사의 뒤편에서 여인들의 글, 혹은 서민의 글로 이어지던 훈민정음, 혹은 언문은 근대화 과정에서 국문이라고 불리다가 ‘한글’이라는 이름으로 통일되었는데, 1910년대 초에 주시경을 비롯한 한글학자들이 쓰기 시작한 것이다. ‘한 나라의 글’, ‘큰글’, ‘세상에서 첫째가는 글’이란 뜻으로, 한글이라는 명칭이 일반화된 것은 조선어학회(한글학회)가 주동이 되어 훈민정음 반포 480년이 되는 병인년(1926) 음력 9월29일을 반포기념일로 정하여 ‘가갸날’로 이름 지은 뒤, 1928년 가갸날을 한글날로 고쳐 부르게 되면서부터이다. 

한국인 건축가 이은영이 설계한 슈투트가르트 시립 도서관.  (출처:www.designboom.com)
# 한글이 새겨진 슈투트가르트 도서관

훈민정음은 3년 후인 1446년(세종 28년) 9월 29일 반포된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웠던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와로 서르 사맛디 아니할세(…)” 바로 그 대목이 나온다.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正音) 28자를 처음으로 만들어 예의를 간략하게 들어 보이고 명칭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하였다. 물건의 형상을 본떠서 글자는 고전을 모방하고, 소리에 인하여 음(音)은 칠조(七調)에 합하여 삼극(三極)의 뜻과 이기(二氣)의 정묘함이 구비 포괄되지 않은 것이 없어서, 28자로써 전환하여 다함이 없이 간략하면서도 요령이 있고 자세하면서도 통달하게 되었다. 그런 까닭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게 된다.(…) 어디를 가더라도 통하지 않는 곳이 없어서, 비록 바람소리와 학의 울음이든지, 닭 울음소리나 개 짖는 소리까지도 모두 표현해 쓸 수가 있게 되었다.”-‘세종 113권, 28년(1446 병인 / 명 정통(正統) 11년) 9월 29일(갑오) 4번째 기사’

그러나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백성들이 문자를 몰라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취지로 이루어진 훈민정음의 창제는 기득권인 사대부 계층의 엄청난 저항에 부딪힌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같은 이는 “우리 조선은 조종 때부터 내려오면서 지성스럽게 대국을 섬기어 한결같이 중화(中華)의 제도를 준행하였는데 (…) 만일 중국에라도 흘러 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는 자가 있사오면,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라며 노골적으로 반대한다. 중화를 사모하는 데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백성이 억울한 데는 별로 관심이 없는 그러한 지도층의 인식이 더 부끄럽기만 하다. 

한국인 건축가 이은영이 설계한 슈투트가르트 시립 도서관의 건물 외관 모습. 외벽에 한글로 도서관이라고 새겨져 있다.
(출처:www.designboom.com)
그런 반대를 무릅쓰고 반포된 훈민정음으로 용비어천가, 석보상절, 세종이 지은 불교 찬가 월인천강지곡, 삼강열녀행실도 등의 번역본이 연달아 편찬되었지만, 어이없게도 58년 후인 1504년 연산군 때 언문을 배우거나 쓰는 일을 금지함으로써 큰 시련을 겪게 된다. “지금 왕은 어떤 왕이기에 신하 죽이기를 파리 목 따듯이 하는가? 언제 이 세월을 뒤집어엎을 수 있을까?”라는 내용의 언문으로 쓰인 투서가 발견되어 분노한 연산군은 그 작성자를 찾지 못하자 아예 언문을 쓰거나 배우지 말고 책도 모두 불태워 없애도록 했다.

그래서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은 표지가 없다. 국보 70호인 이 책은 1940년 경북 안동에서 발견되어 현재 서울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1997년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발음기관을 본떠 만든 자음, 천지인을 본떠 만든 모음, 기본글자에서 파생되는 또 다른 글자들 등 한글창제 원리를 밝힌 훈민정음 해례본은 새로운 문자 훈민정음이 얼마나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문자인지를 입증하는 중요한 유산이다.

누구나 잘 알고 있고 누구나 잘 쓰고 있지만 마치 공기처럼 너무 쉽고 흔해서 그 중요성이나 그 위대함을 잊고 사는 한글.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 업신여김을 당하고 지금도 한문에 비해 열등하다고 열을 올리는 사람이 종종 있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이 바로 조선이 이루어낸 서민적인 문화의 정점이 아닐까 싶다.

2011년 10월 24일에 개관한 독일 슈투트가르트 시립 도서관에는 동서남북을 상징하는 외벽 윗부분에 영어, 독일어, 아랍어, 한국어로 ‘도서관’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동양을 대표하는 언어로 중국어나 일본어 대신 한국어가 선정된 것은 설계자인 이은영 건축가가 도서관 측에 한글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설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34개 작품이 출품된 현상공모에서 당선된 작품으로, 겉으로는 견고한 지식의 요새처럼 보이도록 고안되었으며, 내부는 밝은 빛의, 책의 왕국과 같다. ‘텅 빈 심장’이라 불리며 지식의 근원을 상징하는 1층부터 4층까지 시원하게 뚫린 빈 공간을 만들어 자아 성찰의 경험을 하도록 유도했다. 견고한 모습으로 우뚝 선 저 도서관을 보면서, 외래의 언어에 끊임없이 흔들리는 한글에 대해서도 저 문자로 이룩한 지식의 총화인 책의 성전처럼 견고한 갑옷을 둘러주고 싶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공동대표·‘사람을 살리는 집’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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