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소비자연대 김흥수 대표 |
“제가 당한 게 하도 억울해서 다시는 저 같은 사람이 나오지 않게 돕고 싶었습니다.” 김 대표의 삶을 바꾼 건 1997년 한국을 덮친 ‘외환위기’였다. 하루아침에 신불자가 됐고, 곧이어 카드사의 지독한 채무 독촉이 시작됐다. 김 대표는 “부모와 형제들까지 괴롭히는 것이 너무 괴로웠다”며 “너무 힘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던 것도 여러 번”이라고 털어놨다. 이후 막노동, 택시운전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빚을 갚아가던 김 대표는 우연히 신불자들의 인터넷 커뮤니티에 들어가게 됐다. 그곳에서 자신의 경험을 살려 하나둘 댓글을 달았고, 파산 신청 등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돕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안타까운 마음이었지만, 사람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신불자들을 돕는 곳이 없다는 생각에 점점 더 큰 꿈을 꾸게 됐다. 카페 활동이 인연이 돼 2003년부터는 민주노동당 경제민주화운동본부에서 활동했고, 2005년에는 ‘파산학교’를 세워 무료로 채무자들의 파산 관련 상담을 도왔다. 대선을 앞둔 2007년에는 당시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에서 서민금융 관련 공약을 만드는 데 참여했다. 지금껏 그가 만난 신불자만 수만명에 이를 정도다.
채무 조정은 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여러 문제가 뒤얽힌 복잡한 문제다. 김 대표는 보다 적절한 도움을 주기 위해 낮이면 국회도서관의 자료를 뒤졌고, 밤이면 관련 법규나 책을 붙잡고 씨름해야 했다. 그는 “아무리 술을 많이 마시거나 피곤한 날에도 집에 들어가면 꼭 공부를 했다”며 “학교 다녔을 때 이렇게 열심히 했다면 판사나 검사가 됐을 거란 농담도 한다”며 웃었다. ‘봉사활동’이나 다름없는 일이지만,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김 대표는 “남을 위해 일한다기보다는 과거 힘들었던 나 자신에 대한 ‘한풀이’라 생각한다“며 “내가 느꼈던 괴로움을 남들은 조금이나마 덜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많은 신불자는 어디에 어떻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 몰라 막막해하곤 한다. 김 대표는 “파산과 개인 회생 등의 차이를 전혀 모르는 데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점점 더 큰 빚을 지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몇 년 전에는 아예 신용회복위원회 앞에 6개월간 텐트를 치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일일이 붙잡아 개인회생과 파산, 신용회복 중 어떤 것이 맞는지 상담을 해주기도 했다. 그는 “기관도 여러 곳이고 제도도 많아 어디를 찾아야 할지 혼란스러워하기도 한다”며 “채무자의 이익을 대변하고 적절한 상담을 해 줄 수 있는 ‘종합센터’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 대표는 한국 사회가 ‘빚을 권하는 사회’라고 말한다. 케이블TV 등을 통해 쉽게 접할 수 있는 대부업체의 대출 광고와 과도한 신용카드 마케팅 등이 빚에 대한 ‘불감증’을 키우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마이너스 통장이나 신용카드를 쓰면서도 빚이란 생각을 하지 않는다. 스스로 위기감을 느꼈을 때는 이미 늦은 뒤가 많다”며 “적절한 시기에 개인에게 위험 신호를 주는 시스템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사전 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김 대표는 “채무 탕감 등의 사후 관리 대책을 아무리 내놔도 새로운 신불자들이 생긴다면 가계부채의 악순환은 계속 될 것”이라며 “이미 빚을 진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만큼이나 ‘신규 유입’을 막는 것도 중요한데, 금융당국이 그 부분에 대해서는 손을 놓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자산관리는 고액 자산가들이 하는 것이란 인식이 많지만 사실 자산관리가 가장 필요한 사람들은 서민”이라며 “가계부채는 가정이 파탄 날 수도 있는 문제다. 신불자로 전락하는 것을 막지 못하면 나중에 몇 배의 사회적 비용을 감수해야 하는 만큼 사전 관리 시스템을 확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난 구제는 나라님도 못한다고요? 의지만 있으면 됩니다.”
글=김유나, 사진=남정탁 기자 yoo@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