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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열한 욕망 ·참혹한 몰락… 레퀴엠 선율처럼 위로 되다

입력 : 2013-10-11 18:21:10 수정 : 2013-10-11 18: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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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훈 새 장편소설 ‘나비잠’ 최제훈(40)의 새 장편소설 ‘나비잠’(문학과지성사)은 레퀴엠 같은 소설이다. 소설의 톤이 장중하거나 무거운 건 아니다. 오히려 날렵하고 영리하며 재바른 감각이 도처에 번득인다. 한 번 붙들면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속도감이 생긴다. 로펌을 배경으로 한국사회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의 생리를 정밀하게 드러내는 정보들도 솔깃하다. 현실과 꿈이 교차되는 문학적인 장치를 보강하는 구성이 혹 어지러울 수는 있으나 이마저 빼버린다면 밋밋한 보고서가 될 수도 있다. 독자들은 작가가 설계한 꿈과 현실의 현란한 미로를 따라 달리다보면 디스토피아의 절망 앞에서 큰 울음이라도 쏟아낼 것 같은 정화의 감정에 도달하게 된다.

최요섭, 목사의 아들,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아 현실적인 출세의 길을 선택한 남자. 이를 악물고 고시원에서 고생한 끝에 변호사 자격증을 얻었다. 연수원 성적은 중하위권이었지만 선배를 잘 만나 굵직한 로펌에서 일한다. 소개팅으로 만나 첼로를 연주하는 모습에 반해 결혼한 아내 하영, 그 사이에서 나온 아들 유현. 덩치가 크고 털이 많아 ‘털곰’이라는 별명을 지닌 자신과는 달리 왜소한 그 아들은 중학교 야구 선수다. 요섭은 이 아들을 야구 명문고에 보내기 위해 고급 일식집에서 코치를 만나 쇼핑백을 건넨다. 요섭은 지극히 냉소적이고 현실적인 기준으로 세상을 보는 캐릭터로 보인다. 고시 공부 시절부터 뒷바라지한 가난한 집안의 여자와 ‘고지식하게’ 결혼한 후배 변호사 정우에게 술에 취해 늘어놓는 장광설이 예사롭지 않다.

“넌 말이야, 이 세상이 지금보다 훨씬 더 정의로웠으면 좋겠지? …그래야 너도 이것저것 저울질할 필요 없이 마음껏 양심적으로 살 수 있을 테니까. 지금은 양심에 철판 깔고 여봐란 듯이 잘사는 놈들이 많으니까 갈등 때리는 거잖아. 고생한 게 억울하기도 하고, 응? 아, 내가 너무 고지식한 게 아닌가. 이러다 혼자 낙동강 오리알 신세 되는 게 아닌가, 안 그래? …정의, 좋지. 그렇게 좋은 거면 가만 놔둬도 지가 알아서 살아남겠지. 쪽수로 다구리를 놓건 원터치로 강냉이를 날리건, 씨팔, 살아남아서 자기 존재를 증명하라 그래!”

‘퀴르발 남작의 성’으로 독자들에게 자신만의 정밀한 서사 스타일을 신고했던 신예 작가 최제훈씨. 그는 새 소설에서 “꿈속에서 죽은 이들은 어디에 묻히는 거냐”고 물었다.
편의점 알바 여자를 성폭행한, 배경이 든든한 청년들의 변호를 맡았던 요섭.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 일을 수행하다가 잘 나간다는 거대한 로펌에 아들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찾아온 가난한 노파를 느닷없이 돕는다. 엉뚱하게 선행을 하는 요섭의 행동이 맥락 없는 행위 같지만, 기실 독자가 이러한 느낌을 받는다면 이 소설은 성공한 셈이다. 공교롭게도 이 어울리지 않는 선행 이후로 최요섭은 참혹한 몰락의 자이로드롭을 타기 시작한다. 아내의 불륜 행각을 담은 사진, 코치에게 뇌물을 준 악덕 학부형 기사, 휴지가 된 주식, 왕따가 된 아들의 투신….

아무리 냉혹한 척 쿨하게 사고하는 요섭이지만 이 소설을 끝까지 따라가 보면 요섭의 유전자는 적자생존에 걸맞지 않은 형질로 드러난다. 스포일러의 발설인 셈인데, 읽어 보면 더 다채로운 느낌을 확보할 수 있을 터이다. 현실과 꿈이 교대로 진행되는 이 소설에서 요섭은 늘 궁지에 몰리고 심지어 총에 맞아 죽을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그를 구해준 것은 목에 걸린 메달이었다. 꿈속에서 요섭은 메달의 주인인 어린시절 소녀 나영을 찾아 가기 위해 수많은 굴곡과 위험을 헤쳐 나간다. 그 메달이 상징하는 건, 불행하게도, 혹은 다행히도 성선설을 입증하는 비밀의 코드였다.

안타깝게도 이 소설은 대중의 환상을 외면할 수 없는 드라마처럼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소수의 정교한 보이지 않는 손이 좌지우지하는 현실을 고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 어쩔 수 없는 욕망의 인과관계를 정밀하게 제시하는 여정이기도 하다. 냉혹한 시스템과 그 배후를 증오하다가 무릎을 꿇고 울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 내부의 비열한 욕망이 그 비극의 씨앗임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기한 것은 철저하게 몰락하는 요섭의 아픔을 통해 독자들은 네 활개를 펴고 자는 편안한 나비잠, 카타르시스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장중한 선율의 레퀴엠이 슬픔 그 자체로 듣는 이들을 위무하는 것처럼.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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