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예산이 카이스트의 3배인 캘리포니아 공대(칼텍)의 제트추진연구소(JPL)가 어떻게 출발한지 아십니까. 바로 교수의 따뜻한 말 한마디였죠. 학생들이 장난감 로켓으로 유리창을 깨고 소란을 피울 때 지도교수는 혼내기는커녕 오히려 그 장난감을 연구해보라고 멍석을 깔아줬던 겁니다.” 2월 40여년의 미국 생활을 접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부임한 강성모 총장. 위기상황에 등판한 구원투수의 처지라고나 할까. 전임 서남표 총장의 퇴진 과정에서 발생한 학내 갈등을 해소하는 한편으로 서 전 총장이 뿌려놓은 개혁의 씨앗을 싹틔워야 하는 그의 앞날을 우려하는 시선이 더 많았다. 화합과 소통을 화두로 6개월여의 탐색기를 가진 강 총장은 이 불편하지만 피할 수 없는 숙제에 어떤 해법을 찾았을까. 지난달 27일 대전 유성 카이스트 총장실에서 만난 강 총장은 자신감에 차있었다. 2시간에 걸친 인터뷰 내내 그는 ‘소낙비가 아닌 샘물 같은 변화’를 강조했다. 선굵은 개혁을 선두에서 이끌던 서 전 총장과는 달리 자신의 역할을 놀이마당의 ‘멍석’으로 비유했다. 카이스트의 당면 과제이자 입시와 이공계 기피로 멍든 한국 교육의 해법으로 그가 제시한 것은 ‘창의성과 실수가 용인되는 문화’였다. 그는 “학교는 앞에서 끌기보다 뒤에서 밀어줘야 창의성이 발휘됩니다. 학생들도 정답을 찾는 데 골몰하기보다 실수를 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웃음) 서 총장이 학교의 기반을 든든히 쌓았고 테뉴어 강화 같은 개혁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다만 개혁은 소나기보다 샘물을 닮아야 한다. 조용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꾸준히 흘러야 하기 때문이다. 언론에 요란하게 나는 것도 좋지만 최고의 홍보는 교수나 학생들이 좋은 논문을 쓰고 훌륭한 기술로 사회에 공헌하는 것이다. 카이스트의 좋은 인재들이 좋은 결실을 맺도록 돕는 것이 조국에 대한 나의 소명이다. 구성원들의 생각이 다르지만 소통을 통해 하나가 되는 ‘해피캠퍼스’를 만들겠다.”
―개혁의지의 시험대로 테뉴어(교수 정년제)의 장래를 주목하고 있다.
“교수들도 테뉴어를 반대하는 사람이 없다. 현재 200여명의 테뉴어 심사 대기자들이 있어 당장 기준을 바꿀 수는 없지만 질적 강화가 이뤄질 것이다. 자연과학이나 공학, 인문과학을 같은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문제다. 자연과학이 네이처나 사이언스 논문게재를 최고로 친다면 공학이나 경영학은 또 다르다. 이런 다양성이 고려된 평가 기준을 마련하겠다.”
―카이스트에서의 6개월에 대한 소감은.
“카이스트는 강한 대학이다. 그러나 자만하면 안 된다. 더 큰 일에 도전해야 하고 시야가 국내에 머물러선 안 된다. 졸업생들도 해외에서 더 역량을 키워야 한다. 국제적 역량이 높아지려면 지식 못지않게 언어적 소통이 중요하다. 과학기술의 공통어는 영어다. 자국어에 자부심이 큰 유럽에서조차 영어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교수와 학생 간의 소통 때문에 영어수업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과학기술분야 교재나 논문의 원본은 거의 영어다. 일일이 번역할 수도 없거니와 굳이 번역을 해도 어색하다. 카이스트가 국제화를 추진하고 외국 학생비율도 높아지는데 영어를 외면하는 것은 모순이다. 다만 학생들의 30% 이상이 준비가 안 됐다. 총장실 문을 열어놓고 다양한 의견을 듣고 있다. 교수들에게는 인센티브제를 도입해 자발적으로 영어수업의 비율을 높이는 방안을 마련 중이다.”
―중장기 발전계획인 ‘카이스트 2020’을 이달 말 발표할 계획인데 어떤 내용인가.
“한류문화가 요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브랜드다. 그러나 한국의 최고 브랜드는 과학기술이어야 한다. 그러자면 이를 선두에서 견인할 카이스트가 최고가 돼야 한다. 임팩트 있는 연구가 계속되고 졸업생들의 사회공헌도가 높아져야 한다. 지금까지는 선진국들을 빨리 따라왔지만 앞으로는 쉽지 않다. 창의성과 과감히 도전할 용기 있는 인재 육성이 유일한 방법이다. MS나 애플, 미국의 좋은 대학들은 창의성을 가진 인재를 중시한다. 창의력을 발휘하고 과감히 도전하도록 학교가 학생들에게 멍석을 깔아주겠다. 한 예로 현재 3.0 이하 학점에 대한 수업료 부과기준을 완화하겠다. 현재 제도는 학교 재정은 늘겠지만 국가적으로는 손실이다. 학점 따기 좋은 코스만 고르게 돼 창의적 인재를 키우기 어렵다. 학점 2.9와 3.0에 무슨 실력차가 있겠는가. 도전적인 길을 가도록 수업료 징수 학점을 2.7로 내릴 계획이다. 교수들도 학생들이 학점을 못 따도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워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하버드와 MIT 교수들의 가장 큰 특징은 친절하고 학생들의 충실한 멘토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나 역시 임기를 마쳤을 때 구성원들이 잘하도록 도운 ‘멘토 총장’이란 소리를 듣고 싶다.”
―취임 당시 K밸리 구상을 밝혔는데.
“실리콘밸리 같은 성공한 벤처생태계 배후에는 반드시 좋은 연구대학이 있다. 카이스트에는 불행히도 그런 움직임이 약하다. 모험심을 발휘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지식을 가르치는 것도 좋지만 좋은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 학생들이 과감히 창업해 뜻을 펼치도록 해야 한다. 카이스트는 자체가 세계적 연구대학인 동시에 주변에 뛰어난 연구기관들이 공존한다. 정부에서 추진하는 창조경제를 위해서도 카이스트가 활발한 창업을 통해 그 엔진 역할을 해야 한다.”
―성공하려면 재정적 뒷받침이나 인프라가 선행돼야 할 텐데.
“카이스트가 직접 벤처펀드를 조성해 돕는 방안을 마련 중이다. 미국 사무소를 통해 현지 창업도 지원하고 성공한 카이스트 출신 벤처사업가 800여명을 네트워크화해 펀드를 조성하겠다. 마케팅과 경영을 도울 원스톱서비스, 창업을 위한 공간과 함께 학교가 보유한 연구장비나 시설도 제공한다. 주변의 연구기관들과 스킨십도 강화하겠다. 카이스트와 연구기관들 사이에는 경쟁심으로 벽이 있다. 카이스트가 먼저 그 벽을 허물면 자유로운 소통을 통해 시너지효과를 거둘 것이다.”
―세종시 캠퍼스 조성은 어떻게 돼가나.
“예산과 인력이 한정된 우리나라는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대덕단지와 카이스트가 그 첨병 역할을 해야 한다. 카이스트가 ICT분야 등에서 세계적 경쟁력을 갖췄지만 의과학분야가 약점이다. 21세기에 의과학분야는 매우 중요한 만큼 세종시에 의과학연구병원을 설립하고 오송바이오단지와 함께 난치병 치료기술 개발에 나서는 방안을 구상 중이다. 정부 부처와 연계한 미래전략대학원도 운영할 계획이다.”

“정답 맞히기식 교육이 문제인 것 같다. 법관이나 공무원에게는 적합할지 모르나 과학기술분야는 정답이 없다. 창의성이 좌우한다. 창의성이란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만드는 것이다. 언젠가 MIT 교수에게 동양학생의 약점을 물었더니 ‘문제 푸는 기계 같다’고 하더라. 정답을 찾는 트레이닝만 받았다는 것이다. 얼마 전 병무청장이 병역특례를 받는 우리 학교 학생들을 면담했는데 대답을 제대로 못했다. 이유를 물으니 ‘정답을 모르겠다’고 했다. 생각한 대로 대답하면 될 것을 없는 정답을 찾으려니 말문이 막혔던 것이다.”
―공학도가 된 사연과 미국에서의 성공 비결은.
“독립운동을 하셨던 조부께서 어릴 적부터 미국에서 전자공학을 공부해 나라에 보답하라고 말씀하셨다. 전자공학을 상상할 수도 없는 시대였는데 신기한 일이다. 어렸을 적에는 나 역시 실수가 많은 엉뚱한 학생이었다. 글씨를 못 써 선생님에게 혼나기 일쑤였고, 고교 졸업후 대학 가기 싫어 군에 입대하기도 했다. 뒤늦게 대학(연세대)에 입학했다가 4학년 때 200달러만 달랑 들고 도미했다. 접시닦기 등 안 해본 일이 없다. 내 좌우명이 ‘VIP’다. 남과 다른 비전(Vision)을 갖고 꾸준히 혁신(Innovation)하고 인내(Patient)하라는 것이다. 은사님들의 영향이 컸다. 특히 연구지도교수님은 천재였지만 연구 시간이 없어 점심도 거를 정도였다. ‘천재도 저러는데 아시아 출신인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는 생각에 VIP를 실천할 수밖에 없었다.”
―‘캡틴 스무스’란 별명은 어떻게 생긴 것인가.
“1978년 벨연구소에서 32비트 마이크로프로세서를 개발하다 실패해 책임자가 권총자살한 일이 있다. AT&T가 사활을 건 연구였던 만큼 나를 책임자로 임명했다. 연구원들을 독려하기에 앞서 새벽 3시까지 일했다. 하루하루가 쌓여 위대한 결과가 탄생한다는 생각에 그날 할 일을 정하고 연구원들의 일정을 일일이 짜 제시해줬다. 끌고가기보다 밀어주는 방식 덕분에 결국 성공했고 그때 영광스러운 별명이 생겼다. 산타크루스공대 학장이나 UC머시드 총장을 지내면서 이런 접근방식이 옳다는 것을 확인했고, 카이스트에서도 내 스타일은 마찬가지다.”
대전=임정재 기자 jjim61@segye.com
■ 강성모 카이스트 총장은…?
▲경기 양평(68) ▲연세대 전기전자과 ▲미국 페어레이 디킨슨대 학사 ▲뉴욕주립대 석사 ▲UC 버클리대 전기전자공학 박사 ▲AT&T 벨연구소 연구원 ▲일리노이주립대 교수 ▲UC 산타크루스 공대 학장 ▲UC 머시드대 총장 ▲2008년 올해의 자랑스러운 한국인 상 수상
▲경기 양평(68) ▲연세대 전기전자과 ▲미국 페어레이 디킨슨대 학사 ▲뉴욕주립대 석사 ▲UC 버클리대 전기전자공학 박사 ▲AT&T 벨연구소 연구원 ▲일리노이주립대 교수 ▲UC 산타크루스 공대 학장 ▲UC 머시드대 총장 ▲2008년 올해의 자랑스러운 한국인 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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