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정보기관에선 세력화를 우려했던 것 같아요. 밤샘 심문을 받고 유치장에 갇히는 신세가 됐지요.”
그는 얼마 후 담당형사에게 이끌려 서장실로 안내된다. 거기엔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형사는 배가 고플 테니 많이 먹으라며 주인 없는 방에 그만 남겨 놓고 나갔다.
“의아스러웠지만 일단 먹고나 보자는 심정에서 허겁지겁 먹어치웠어요. 조금 있으니 차 한 대가 도착하고 그 차에 태워졌습니다. 한데 타자마자 문을 덜커덕 잠가 버리는 게 아닙니까. 창문도 없는 차라 덜컥 겁이 났어요. 사형집행 땐 잘 먹인다는 얘기도 있어 공포감이 몰려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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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림 작가는 “미술사에 남겨진 작가치고 미쳤다는 소리를 듣지 않았던 작가는 없었다”며 그것이 앞서 나가는 ‘전위’들의 숙명이라 했다. 허정호 기자 |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무죄석방에 주간지 국장들의 ‘숨은 노력’이 컸습니다. 언제나 제가 벌이는 행위예술은 당시 주간지의 입맛에 맞는 화젯거리였지요. 제가 일을 벌였다 하면 주간지 판매량이 배로 늘어날 정도였지요. 한 주간지 책임자는 돈을 대줄 테니 자신들에게만 정보를 달라고 하기도 했어요. 어쨌건 제가 붙들려 가자 주간지가 잘 안 팔렸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주간지 쪽에서 죄가 없으면 빨리 풀어주라고 종용을 한 것이지요.”
경찰이나 재판부나 괜히 자신들에게 불똥이 튈라 속전속결로 처리를 한 셈이다. 그렇다고 일이 다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정보기관에서 고향집을 뒤지고 부모님까지 조사를 벌였지요. 매형이 걱정이 돼 서울로 저를 찾아오기까지 했습니다.”
그에게는 늘 형사가 따라붙었다. 요주의 인물로 지목이 된 것이다.
“어느 날 담당형사가 죽겠다고 하소연을 하더라고요. 애처로워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제4집단’ 해체 선언을 하게 됩니다.”
1년도 안 돼 해체된 ‘제4집단’을 요즘도 아쉬워하는 이들이 많다. 10년만 지속됐다면 한국현대미술이 엄청난 발전을 이뤄냈을 것이란 판단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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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상품화되는 세태를 꼬집은 1970년 작 나를 사가시오(명동거리 쇼윈도에서 실현하려고 했던 작품. 당시 경찰 제지로 무산됐다가 서울시립미술관 전시에서 재현). |
한때는 영화감독을 꿈꿨으나 종국엔 미술로 진로를 정했다. 초중등 시절부터 두각을 보였던 그리기 솜씨도 고려됐다.
집안환경 덕에 문화사조에 앞서 있었던 그는 미대 입학 후 새로운 현대미술에 대해 목말라 한다.
“제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해주는 교수가 없었어요. 일본에서 공부한 교수들은 고작 피카소 정도를 아는 수준이었지요. 결국, 독학을 결심하고 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헌책방에서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라이프’지, ‘타임’지를 보게 된다. 거기엔 물감을 캔버스에 뿌리고 붓질을 하는 액션 페인팅 기사가 실려 있었다. 야외 이젤 앞에서 인상파류의 그림을 그리던 시절이라 충격으로 다가왔다. 현대음악가 존 케이지와 슈토크하우젠, 현대무용가 머스 커닝햄도 알게 된다.
“고압선이 흐르는 전주 밑을 걸어서 빙빙 도는 것을 무용이라고 보여주는 커닝햄의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그는 영화도 만들고 연극과 무용을 연출하기도 하면서 한국예술가들의 협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영화나 연극계 사람들을 만났지만 처음엔 시큰둥했다.
“토론의 장을 마련해 설득을 해나갔지요. 그렇게 각계각층 문화계 인사들을 모아 출범시킨 것이 ‘제4집단’이지요.”
그는 40t의 얼음 위에 빨간 보자기를 씌워 지금은 없어진 경복궁미술관 현대작가초대전에 설치를 하려 했으나 불발이 됐다.
“기존 조각의 개념을 완전히 깨버린 것이지요. 나무를 깎고 돌을 쪼거나, 브론즈로 만드는 것만이 조각이라 생각한 사람들에게 이해가 안 됐지요. 천과 얼음으로도 조각을 할 수 있고, 시간에 따라 변할 수도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지요.”
그의 통념을 깬 ‘허튼짓’에 사람들은 미친 짓이라 했다. 몰이해에 고민하던 그는 1973년 일본행을 감행한다.
“제가 과연 미친놈인가 검증을 받고 싶은 심정이었지요. 도쿄 히로다(白田) 갤러리에서 삽 걸레 옷걸이 전등 등의 설치작업을 선보였습니다.”
일본의 권위 있는 ‘미술수첩’에도 그의 기사가 실리자 국내미술계도 그를 달리 보기 시작했다. 1975년 귀국을 했지만 여전히 학벌과 인맥이 없는 그는 주류미술계의 왕따였다. 이건 아니다 싶어 그는 1984년 미국으로 떠난다. 1992년 백남준과 ‘2인전’도 열었다. 액션 페인팅의 대가 잭슨 폴록과 모바일아트의 거장 알렉산더 칼더를 배출한 뉴욕 ‘아트스튜던트리그’에서 공부도 한다. 그의 능력을 알아본 캘리포니아 모던뮤지엄으로부터 개인전 초청을 받는다. 그것도 이야기가 있는 그림으로 유명한 데이비드 호크니 개인전에 이어서다.
“500호가 넘는 대작들을 선보였어요. 3개월간 전시를 끝내면서 미술관 측에선 미국시민권을 얻을 것을 종용했지요. 다른 지역 미술관 전시 일정까지 내보이면서 설득을 했지만 응하지 않았어요. 미국작가를 만들어 놓고 키우려는 속셈이 내키지가 않더군요.”
그는 2000년 문예진흥원초대전을 계기로 15년간의 미국생활을 접고 귀국을 하게 된다.
“충분한 예산도 확보해 놓은 상태에서 전시를 하라 하니 이게 조국인가 싶어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 길로 짐을 쌌지요.”
지난해엔 세계 3대 미술관으로 꼽히는 영국 런던 테이트 모던에서 잭슨 폴록, 데이비드 호크니, 구사마 야요이가 함께 참여하는 기획전에 초대됐다. 테이트 모던 미술관 큐레이터가 도서관에서 자료를 보고 연락을 해 왔다. 테이트 모던은 이와는 별도로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김구림 초대전(10월 13일까지)에 출품된 작품중에서 3점을 골라 소장품으로 구매할 예정이다.
도자기로 종이 조형물을 만들고 브론즈로 우유팩 조형물을 만들어 한국 현대 도자와 조각에 자극제가 됐던 그는 일렉트릭아트, 대지미술, 퍼포먼스, 설치미술, 사진과 그림의 융합, 실험영화 등 전방위적으로 1960∼70년대 한국미술의 선구자 역할을 해 왔다. 그는 요즘도 다양한 실험을 한다.
“1960년대만 해도 미디어라고 하면 라디오가 전부였습니다. 2000년대는 인터넷시대지요. 그만큼 세월도 변했고 인간사고도 변했습니다. 당연히 작품도 변화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짓거리만 계속한다면 진정한 작가가 아니지요. 똑같은 작품만 하는 것은 공장에서 상품을 생산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어요.” 이제야 국내외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그에게 유일한 소망은 자신의 작품을 모두 보여줄 수 있는 전시회를 갖는 것이다. 이제 우리 미술계가 화답할 때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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