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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진의 차맥(茶脈)] <65> 조선 후기 선비 차인들 ⑮ 다산의 두 아들 학연·학유, 김명희, 신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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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08-12 20:43:14 수정 : 2013-10-23 23:3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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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들이 면면히 이어온 茶 전통, 조선 후기 승려들에 전수돼 조선 후기 차문화 중흥의 마지막 조연들은 누구일까. 다산·초의·추사의 주변에는 해거도인·이유원·신위 외에도 수많은 선비와 인물이 있었다. 오늘날 차 전문가나 학자 중에는 우리 차문화가 조선시대에 마치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인식하거나 절간에서 다시 부활한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고려의 말차(抹茶) 전통은 조선에 들어 잎차 전통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것은 다분히 명나라가 주원장의 뜻에 따라 잎차로 선회한 것에 발맞추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에서는 중국에서 명품의 녹차와 보이차를 수입하였고, 이들 명품 차는 선비사회에 기호식품으로 자리하였다.

조선후기의 차문화는 선비들에 의해 이어지다가 다시 절간의 승려들에게 전수되었다고 봐야 한다. 다산과 초의는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신라나 고려 때부터 절간에서 전해오는 차 전통은 차 생산지를 중심으로 산발적으로 전해오기는 했겠지만, 그것은 미미했다. 일제는 한국의 전통 차 정신을 말살하고, 자신의 다도(茶道)를 접목하였다. 오늘의 한국 차 전통은 크게 보면 아직 일본 다도에 종속되어 있고, 차인들 가운데는 일본 다도가 곧 우리의 다도가 돼야 한다고 착각하는 부류도 없지 않다. 이는 문화적 정체성을 모르는 소치다.

선비들의 차 전통은 면면히 이어져 왔다. 다산의 아들 가운데 맏아들 유산(酉山) 정학연(丁學淵, 1783∼1850)과 둘째 아들 운포(耘逋) 정학유(丁學游, 1786∼1855), 추사의 동생 산천(山泉) 김명희(金明喜, 1788∼1857), 그리고 전라우수사로 해남에 가게 된 인연으로 초의와 가까웠던 신헌(申櫶, 1811∼1884)은 조선 후기 차 문화중흥의 조연급치고는 큰 인물이다. 다산의 두 아들은 유배 시절에 강진을 여러 차례 왕래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제자들, 대둔사 승려들과 교분이 두터웠다.

정학연의 기록에 따르면 다산은 유배 가기 전부터 집 안에서 차를 즐겼음은 물론이고 관련서적을 두루 섭렵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산이 강진에 유배 가서 차를 배운 것이 아니다.

정학연이 쓴 ‘종축회통(種畜會通)’은 농업과 축산에 관한 지식을 모은 글이다. 이 필사본은 8권3책으로 일본 소장가에 의해 전해진다. 이 중 제3책 권5에는 ‘차’ 항목을 별도로 마련해 기술하고 있다. 정학연은 당시 차에 관한 여러 책과 정보를 정리했는데 다산의 학문 태도를 그대로 닮았다. 그가 인용한 몇몇을 보면 다음과 같다. 차씨를 심어서 키울 때의 주의사항을 정리한 대목이다.

“익었을 때 거두어 열매를 취해 젖은 모래흙에 섞어 대광주리에 휘저어 담는다. 볏짚이나 풀로 덮어주지 않으면 바로 얼어 싹이 나오지 않고, 2월 중에야 나온다. (중략) 이 물건은 햇빛을 두려워하므로 뽕나무 밑이나 대나무 그늘에 심으면 다 좋다. 2년 뒤에야 바야흐로 김을 매서 손볼 수 있다. (중략) 대개 산중에 비탈진 곳이 좋고 만약 평지라면 양쪽 두둑에 깊게 이랑을 파서 물이 잘 빠지게 해야 한다.”(‘사시유요·四時類要’ 중에서)

“차를 보관할 때는 반드시 주석으로 만든 병을 써야 한다. 그러면 차의 빛깔과 향이 비록 해를 넘겨도 전과 같다.”(‘화경·花鏡’ 중에서)

“거두어 간수하는 것은 반드시 대 껍질을 잘라서 만든 대그릇에 섞어서 저장하면 오래되어도 눅지 않는다.”(‘현호 선생 말씀’ 중에서)

‘일지암시고(一枝庵詩稿)’와 정학연의 시집 ‘삼창관집(三倉館集)’에는 그의 시가 실려 있다. ‘삼창관집’의 ‘서회(書懷)’라는 작품을 보자.

“세상이 버려도 저술을 하고/ 가난해 술조차 외상을 하네/ 늦은 구름은 방죽나무 걸려 있고/ 봄비에 제방 모래 잠기었네/ 강가 시장의 멥쌀을 싸기도 하지/산방에서 차 새싹(茗芽) 봉지 열어보네/ 시골살이 6년은 흡족하네/ 유서 깊은 일은 자랑하기에 족하다.”

다산의 아들 학연과 학유가 공부하고 차를 마셨던 남양주 능내리 여유당 주변.
다음은 그의 차시 ‘전다(煎茶)’이다.

“간밤 숙취에 늘어지게 잠을 잤네/ 석탄을 지피니 게 눈알(蟹眼)처럼 끓네/ 물맛은 혜산천(惠山泉)에 비길 수 없지만/ 목영(木?, 찻잔을 말함)은 월주자(越州姿, 중국 월주요의 그릇)만 못하지 않네/ 사마상여 갈증이야 적셔주기 너끈해도/ 동방만청 굶주림은 구하기 어렵네/ 채석하던 마른 장에 어이 차를 마시랴만/ 한가한 중에 담박한 생애를 지어보네.”

이 밖에도 그는 차관(茶罐)에 관한 시도 지었고, 차 생활 전반을 다룬 시도 지었다. 차를 청하는 편지도 적지 않다. 이 중 대둔사의 선사들에게 보낸 서간을 소개해보자. ‘유산일문기대둔사제선사간찰첩(酉山一門寄大芚寺諸禪師簡札帖)’의 제3신이다.

“초의가 이곳에 있는 덕분에 연달아 글을 받자오니, 매번 사람의 마음을 상쾌하게 합니다. (중략) 초가을에 선정(禪定)이 맛나고, 지체도 청건(淸健)하심을 알게 되어 몹시 기쁩니다. 저는 양친의 병환이 봄여름을 지나 가을까지 이어지고, 제 묵은 병도 또 이와 같은지라, 눈썹을 펴고 입을 열 날이 거의 없는 형편입니다. (중략) 부쳐주신 차는 참으로 기이한 선물이니, 사양하지 않으렵니다. 뒷 인편에 또한 이 같은 갈망을 생각하셔서 더 낫게 보내주시면 몹시 다행이겠습니다.”

다산과 학연은 둘 다 몸이 건강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고, 차를 약차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학연이 차의 깊이를 더하게 된 계기는 당대 영의정을 지낸 심상규(沈象奎, 1766∼1836)와 친해지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당시 장서는 물론이고 호사를 누린 인물로 중국의 유명 차를 산지별로 구해 마신 인물이다. 정학연은 한 번은 심상규에게 대둔사의 차를 대접했는데 크게 칭찬을 받게 된다. 당시 대둔사의 차는 ‘장춘차(長春茶)’라 불렸다. 대둔사의 장춘동 골짜기서 따온 이름이다.

“정말 좋은 중국 차는 구하기가 어렵고, 값만 비싼 저질품은 마실 수가 없으니, 엉터리 가짜 중국 차를 마시느니 차라리 장춘차가 낫다.”

한강 일대의 차인들이 자주 드나들었던 수종사(水鐘寺) 차실에서 옛 선조를 떠올리며 생각에 잠겨 있는 필자.
중국과의 차 사정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했던 것 같다. 차가 생활필수품인 중국과 기호품인 한국의 무역관계에서 언제나 한국의 차 애호가는 중국의 값비싼 차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

정학연은 초의의 제자인 호의(縞衣) 스님과 빈번한 교류를 하였다. 당시 초의와 호의가 만든 수제차는 서울의 차인들에게 최상급으로 통했다. 다산의 둘째 아들 학유도 형처럼 승려들과 잦은 교신을 했다. 특히 그가 서울로 부쳐온 초의의 차를 받아들고 감사의 뜻을 담아 보낸 차시는 일지암의 풍경과 초의의 하루 일과가 잘 드러나 있다.

“초의 스님 정작 풀은 가꾸지 않으시고/손수 청죽 심으시니 만 그루가 어여쁘다/ 죽향실(竹香室) 안에서는 해를 봄도 더디겠고/ 금강암 기슭에서 바람맞이 이르겠네/ 가부좌하고부터 잦은 출입 어려워/ 다만 겨우 연못가를 열 걸음쯤 보신다네/ 목어소리 잦아들면 침상에 절반 달빛 들고/ 이슬 듣는 맑은 밤엔 풍경소리 끊이잖네/ 푸른 난새 항상 향대(香臺)로 내려오리/ 남쪽 바다 붉은 노을 한 길이 열렸구나/ 바람 없이 절로 떨림 그대는 아시는가/ 꿈속에서 도롱이 옷 떨쳐 입고 오시누나.”

일지암은 대둔산 금강암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정민 교수(한양대 국문학)가 ‘일지암시고’의 내용과 관련문서를 소상히 추적한 바에 따르면 초의는 1830년 일지암을 짓고 1833년에는 둘레에 나무를 심었다. 이는 ‘종죽(種竹)’이라는 장편시에 남아 있다. 일지암의 둘레는 온통 대밭이었다. 그래서 일지암을 ‘죽향실(竹香室)’이라고도 했다. 초의 스님은 학유의 시를 받고 답시 2수를 썼다. ‘운포의 차시에 삼가 답하다(奉答耘逋茶詩)’가 그것이다.

“백 가지 기이한 꽃 천 가지 풀들은/ 아침 피어 저녁 지니 늘 곱지가 않다네/ 어이타 대나무가 곧은 덕성 품고서/ 늦은 봄 이른 서리 원망찮음 같겠는가/ 옮겨 올 젠 고개 넘은 어려움도 마다 않고/ 곡진하게 주인 위해 그윽한 태 상쾌하다/ 홀로 성긴 그림자는 못 속 달빛 벗을 삼고/ 여린 가지 봉새 와서 깃들기를 기다리네/ 석양이라 번진 노을 찬 누대에 가득하여/ 무더위가 뚫으려도 문을 열지 않는다네/ 바람 없이 잎 흔들자 옥을 가는 소리 나니/ 남새 탄 이 옷깃 떨쳐 오는 줄을 알겠구나.”

“숨은 바위 가만 앉아 푸른 풀을 마주하며/ 멍하니 종일 봐도 담담히 별일 없네/ 구름 끝의 학(鶴) 스님이 나를 찾아오셨으니/ 푸른 안개 신을 적셔 일찍 나선 줄 알겠네/ 바쁜 손길 경쾌하게 어렵잖게 펼치니/ 날 재촉해 함께 보자 봉함을 열게 하네/ 속에 싼 여룡 구슬 밝은 달빛 한가지라/ 품에 가득 눈에 온통 광채가 끝이 없다/ 천 리 길에 서로 함께 영대(靈臺)를 비추시니/ 일생의 회포가 하나하나 열리누나/ 무엇보다 마음 상해 억누를 수 없는 것은/ 생전에 한 차례 더 왕래하지 못함일세.”

구한말 무인이면서 외교가로서 한미수호통상조약의 서명자였던 신헌의 초상화.
정학연과 학유 형제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초의 및 호의 스님과 각별한 우정을 나누었음을 알 수 있다. 유불선이 한자리에 있었다. 추사의 동생 산천 김명희는 ‘차 만드는 법’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대둔사 승려인 향훈에게 채다와 제다에 이르기까지 6개 항목에 걸쳐 소상하게 ‘다법수칙(茶法數則)’을 써 주었다. 산천이 써준 내용은 직접 지은 것이 아니라 서유구(徐有矩, 1764∼1845)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서 간추린 것이라고 정민 교수가 밝히고 있다.

아무튼 산천이 인용한 차 관련 서적들을 보면 ‘대관차론’, ‘복원별록’, ‘다소’, ‘다전’ 등 차의 고전들로서 차에 관한 지식이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추사는 초의와 향훈에게 차를 얻어 마셨는데 이때 동생인 산천도 자연스럽게 차를 접하여 마셨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산천을 왜 향훈에게 차를 만드는 법을 소상하게 설명하려고 했을까. 여러 추측을 해볼 수 있지만 이는 결국 사찰에서 차 만드는 법이 제대로 전수돼 있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고, 더욱이 향훈이 산천에게 물었을 수 있다고 본다면 조선조 사찰에서 전수됐다고 보기 어렵다. 조선의 주류문화는 어디까지나 선비문화였고, 차문화의 전통을 그나마도 선비들에게서 찾아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신라나 고려조에는 사찰에서 선진 외래문화가 융성했지만 조선조에서는 사찰은 주류에서 밀려난 까닭에 차문화에서도 변방에 속했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의 차문화는 선비사회를 통해서 보지 않으면 쉽게 단절된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신헌(초명은 신관호)은 무엇보다도 후일 한미수호통상조약(1882년 5월22일)의 서명자로서 알려진 무인이면서 외교가다. 무인이 차를 애호한 경우는 드물지 않지만, 그만큼 차가 관료사회에서는 일상화되었음을 말해준다. 그는 1843년 11월15일 전라우수사로 해남에 내려간다. 그는 초의의 명성을 알고 있었고, 이미 ‘증초의순공(贈草衣洵公)’과 ‘증초의상인(贈草衣上人) 등의 작품을 지어 건넨 처지였다. 그래서 1845년에 대순사로 초의를 찾아갈 정도였다.

신헌은 특히 자신의 문집 ‘금당기주(琴堂記珠)’에 초의에 관한 시와 산문을 남겨 초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 인물이다. ‘금당기주’에 실린 여러 글 중에는 ‘초의시집발’과 ‘초의선사화상찬’, 그리고 ‘초의대종사탑비명’ 등 초의와 관련된 가장 많은 글을 남겼다. 신헌은 뜻밖에도 초의와 선종·교종의 이치를 두고 장문의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는데 초의가 벽파와 선교(禪敎) 논쟁을 벌일 때도 이때의 경험이 작용했을 것이다.

신헌은 한때 녹도(鹿島)에 귀양 간 적(1849∼1854)이 있었는데 초의는 두 번씩이나 녹도를 찾아가 위로하기도 했다. 당시 초의는 신헌에게 자신의 시집 서문을 써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것이 ‘초의시고(艸衣詩藁)’의 발문이다. 신헌은 1857년 해배되어 서울 한강가의 창랑정에 머물렀는데 당시 초의는 완당의 영전에 분향하고 제문을 올릴 겸 해서 상경하여 두 사람을 만났다.

신헌과 초의는 스물다섯 살의 나이 차이에도 매우 의기투합하였던 것 같다. 1866년 초의가 세상을 뜨자 제자인 선기(善機) 등의 요청에 따라 ‘초의선사화상찬’ 병서를 짓는다. 물론 평소에 초의와 깊은 우정을 나눈 탓이다. 신헌의 ‘초의선사화상찬’을 보자.

“스님 오심 공이요/ 떠나심도 공일세/ 가고 옴이 다 공이나/ 또한 장차 같지 않네/ 한 폭의 그림에다/ 풍신(風神) 굳이 남긴대도/ 천축국 엄연하니/ 그 자취 본시 없다/ 붙잡고 움키어도/ 물 위 달빛 솔바람일세/ 스님이 있건 없건/ 처음과 끝 뉘 말하랴.”

다음은 신헌이 1843년에 지은 ‘초의 의순에게 주다(贈草衣洵公)’이다.

“두륜산 아래에서 마니주(摩尼珠) 굴리니/ 색색마다 여여(如如)하여 그림자 따라오네/ 멀리서 그리다가 남쪽 와도 못 만나니/ 기이한 그림과 글 아직 보지 못했구려.”

신헌은 차 마니아였다. 그가 남긴 ‘벽간소기(壁間小記)’에 보면 거처의 벽에 주문공(朱文公)의 ‘백록관학규(白鹿館學規)’을 써 붙여놓고 “아침 차 마시기 전에 20번, 마신 뒤에 20번, 저녁 차 마시기 전 20번, 마신 뒤 20번을 읽는다”라고 되어 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아침저녁으로 차를 즐겨 마셨음을 알 수 있다. 신헌은 여러 편의 차시를 남겼다. 이 중에서 젊은 시절 친구인 ‘중유가 차를 보내준 데 감사하며(謝仲猶惠茶)’를 보자.

“멀리서 삼베 꿰맨 봉지가 오니/ 그 속에 일곱 근의 차가 들었네/ 은근하게 손으로 직접 뜯어서/ 마침내 입맛에 좋게 하였지/ 차 맛이야 얻을 수 있다고 해도/ 그 운치 참으로 얻기 어렵네/ 한 줌의 산초와도 견줄 수 없고/ 패옥을 갚기는 외려 작다네/ 어이해야 꽃다운 소식 이을까/ 다시 거듭 세 번 탄식 일으키누나.”

차가 얼마나 귀한 음료이며 정성의 선물인가를 알 수 있다. 패옥으로도 갚을 수가 없다고 했다. 차를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박정진 객원논설위원·문화평론가 pjjdisc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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