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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51> 배천조씨·임천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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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06-24 19:32:14 수정 : 2013-06-24 19:3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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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태조의 후손들 황실의 난 피해 고려에 넘어와 정착
충남 금산의 칠백의총과 기념관. 조헌은 곽재우 등과 함께 임진왜란 4충신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금산의 칠백의총은 금산전투에서 분전하다 산화한 조헌, 영규대사 등 700명의 의병을 모시기 위해 세워졌다.
송 태조 조광윤의 후손인 배천조씨·임천조씨

배천조씨(白川趙氏)와 임천조씨 (林川趙氏)는 송나라를 세운 태조 조광윤(趙匡胤)의 후손들이다. 조광윤의 아들이 위왕(魏王) 조덕소(趙德沼)이고, 그 아들이 배천조씨의 시조인 조지린(趙之?)이다. 또 조덕소의 아들 중 기왕(冀王) 조유길(趙惟吉)이 있는데, 조유길의 아들이 임천조씨의 시조인 조천혁(趙天赫)이라고 전하고 있다. 그러니까 배천조씨 시조 조지린은 임천조씨 시조 조천혁의 숙부가 되는 셈이다. 이들이 어떻게 해서 고려에 들어와 정착을 하게 되었는지는 ‘증보문헌비고’나 ‘조선씨족통보’ 등에 나와 있다. 즉, 조광윤의 적장자인 조덕소의 아들이었지만, 황실의 난을 피해 고려에 와서 정착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런 과정은 송나라 건국 역사와 조광윤의 일대기를 보아야 이해할 수 있다. 송 태조 조광윤은 중국 역사에서 후한 광무제 유수, 당 태종 이세민, 금나라 세종 야율옹, 청나라 강희제 애신각라현엽 등과 함께 5대 현군에 들어가는 황제이다.

송태조 조광윤 영정. 배천조씨, 임천조씨의 선조이기도 한 조광윤은 일개 군관에서 황제에 올랐고 높은 덕성과 학식, 효심으로 중국의 역사에서 영명한 황제들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인물이다.
조광윤은 중국의 최고 혼란기인 5대 십국시대에 후당의 군관이었던 조홍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21세에 절도사 곽위의 휘하에 군관으로 들어가면서 출세가도를 달렸다. 곽위가 후당을 멸하고 후주를 세운 뒤 그의 아들 세종(시영)의 총애를 받아 절도사의 지위까지 올랐다. 그런데 세종이 갑자기 죽자, 어린 태자(공제, 시종훈)가 황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혼란기에 어린 황제의 등극으로 불안감을 느낀 동생(조광의)과 부하들이 조광윤을 추대하여 황위를 선양 받게 하였다(진교의 변).

이렇게 군대를 통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조광윤이었지만, 학식과 덕망이 뛰어났다. 그래서 절도사의 병권을 빼앗고 황권을 강화했으며, 문치주의 정책을 시행했다. 또, 비판을 하는 선비(사대부)를 절대 죽이지 말고, 후주의 황제였던 공제의 후손들을 끝까지 잘 보살피도록 유훈을 남기기도 했다. 효행 또한 남달리 깊어 그의 어머니인 소헌황후(두태후)의 말을 끔찍이 따랐다고 한다.

소헌황후는 어린 태자로 황위가 계승되면서 정변이 일어나 대가 끊기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조광윤에게 황위를 나이 어린 아들에게 계승할 것이 아니라 동생인 조광의에게 물려줄 것을 유훈으로 남겼다. 송태조 조광윤이 49세(일설에는 50세)의 나이로 갑작스레 죽고 나자 동생인 조광의가 황위를 이었는데, 이가 송나라 태종이다.

그런데, 조광의가 황위에 오르자 조광윤과는 달리 일가친척들을 죽여버렸다. 조광윤의 두 아들로 조덕소와 조덕방이 있었는데, 조덕소는 황제인 조광의에게 진언하다가 노여움을 사고,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자결한다. 또 동생인 조덕방은 집에서 갑자기 급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다음 황위를 계승할 아우인 조정미는 모반을 꾀한다는 모함으로 유배를 받아 쓸쓸히 생을 마감한다. 그래서 조광윤의 후손들은 뿔뿔이 흩어져 숨어 살게 되었다.

어찌 되었든 이런 과정을 통해 조광윤의 후손인 배천조씨의 시조 조지린과 임천조씨의 시조 조천혁이 고려로 흘러 들어와 정착하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배천조씨 시조 조지린 영정. 조지린은 송태조 조광윤의 손자이자, 위왕 조덕소의 아들로 아버지가 자결을 하자 고려로 피란와 배천에 정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배천조씨 연혁과 인물

배천(白川)은 지금의 황해도 연백군의 옛 지명이다. 한자로 ‘白川’이라고 쓰지만 ‘배천’으로 읽는다. 고려 초에 배주(白州)로 고쳤으며 의종 때 해주(海州)에 속하게 하였다. 조선 태종 때 배천군으로 개칭되어 1914년 연안(延安)에 병합되어 연백군(延白郡)이 되었다. 배천조씨의 시조 조지린은 송나라 태조 조광윤의 맏아들인 조덕소의 아들로 979년(고려 경종 4, 송나라 태평흥국 4년)에 난을 피하여 은천현 도태리(황해도 배천)에 정착하였다. 그는 고려 현종 때 금자광록대부로 좌복야,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조양유(趙良裕)가 덕종과 정종에 걸쳐 판위시승(判衛寺承)을 지내고 추의찬화익조공신으로 문하시중에 오르고 배천군(白川君)에 봉해졌기에 후손들은 배천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조양유의 아들 조선정(趙先正)은 고려 문종 때 과거에 올라 벼슬이 은청광록대부로 문하시중 태자태사에 이르렀다.

대제학을 역임한 조옥(趙玉)의 아들 조문주(趙文胄)는 병부상서를 지내고 고종 때 위사공신(衛社功臣)으로 은천군(銀川君)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조오(趙傲)·조진(趙珍) 형제와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조오는 원종 때 동지추밀원사로 원종폐위사건에 가담하지 않았으나 위사공신이 되었다. 그리고 배주(白州, 배천)의 지부흥군사(知復興郡事)가 되었다. 그 외에도 고려조에서 배천조씨 가문의 인물로는 평장사를 지낸 조중장(趙仲璋),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조성주(趙成柱) 등이 있다.

조선 초에는 조림(趙琳)이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에 오르고, 개국 2등공신인 조기(趙琦)와 조반(趙?)이 각각 지중추원사, 참찬문하부사에 올랐다.

조기는 문하시중이었던 조진의 4세손으로, 조부는 검교시중 상서좌복야국자좨주였던 조선(趙瑄)이며, 아버지는 문하좌찬성이었던 조성주이다. 위화도회군 이후 이성계의 휘하로 들어가 군무를 담당하였다. 개국공신 2등으로 보조공신의 호를 받고 동지중추원사·의흥친군위동지절제사(義興親軍衛同知節制使)가 되었으며, 은천군에 봉해졌다. 그가 죽자 왕이 매우 슬퍼하여 이천우(李天佑)를 보내 치제하였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조반은 삼중대광보국 은천군 조하(趙何)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호군이었던 조세경(趙世卿)이다.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가서 한문과 몽고어를 배웠다. 이후 원나라 승상 탈탈의 인정을 받아 중서성역사(中書省譯史)가 되었다.

공민왕 때 환국하였으며, 우왕 때 명나라에 가서 시호와 승습을 청했고, 돌아와 밀직부사가 되었다. 그 뒤 동지밀직사사·개성윤이 되었다. 조선 개국 후 개국공신 2등에 책록되고 복흥군(復興君)에 봉해졌으며, 지중추원사가 되었다. 태조 때 이방원(태종)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다.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를 거쳐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숙위(肅魏)이다. 또 조선조 배천조씨 인물로는 임진왜란 때 충신으로 유명한 조헌(趙憲)이 있다. 그는 조응지(趙應祉)의 아들로 율곡(栗谷) 이이와 우계(牛溪) 성혼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좌랑 등을 거치고 통진현감을 역임하였다. 누차에 걸친 상소와 직간으로 유배되거나 파직되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청주를 탈환하고 금산전투에서 분전했으나 사망했다. 지금도 전하는 ‘금산 700의총’은 조헌과 함께 분전하다 죽은 의병을 기리는 무덤이다. 사후 선조 때 이조판서, 영조 때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특히 그는 문장과 덕행이 뛰어났고, ‘중봉집(重峰集)’ ‘중봉동환봉사(重峰東還封事)’ 등이 전한다.

배천조씨 조헌 영정.
부호군 조충(趙庶)의 아들인 조정호(趙政虎)는 광해군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전적(典籍) 등을 지내다가 인조반정 후 지평을 거쳐 대사간에 올랐다. 인조가 부친인 정원군을 원종(元宗)으로 추존하려 하자 이를 반대하다가 한때 파직되었으나, 다시 기용되어 병조판서와 강원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조정호(趙政虎)의 아들 조석윤(趙錫胤)은 인조 때 별시문과에 올라 호당에 뽑혀 사가독서로 학문을 연마하고 수찬(修撰)과 승지 등을 거쳐 대사간을 역임 한 후, 효종 즉위년에 양관 대제학으로 ‘인조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조겸행(趙謙行)의 아들인 조석주(趙錫周)는 숙종 때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장령(掌令)을 역임했으나, 만년에는 학문에만 진력했다. 죽은 후 효행과 청백으로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그 외에도 군수를 역임한 조석록(趙錫祿), 조상한(趙相漢), 현감을 역임한 조수달(趙壽達)이 있다.

배천조씨의 현대인물로는 학계에서는 천문학자 조경철 박사가 유명하며, 조영식(경희대 총장) 조기홍(성신여대 부총장, 성신학원 이사장) 조의설(연세대 부총장) 조효원(경희대 경영대학원장) 조석준(서울대 교수) 조성식(고대 교수) 조우현(연세대 교수) 조선휘(서울대 교수) 등이 있다. 정계에서는 조영장(국회의원)이 있고, 재계에서는 조내벽(라이프그룹 회장) 조군실(기원산업 사장) 조원준(천도제약 사장)이 있고, 종교계에는 조향록 목사가 있다.

배천조씨의 주요 파로는 부흥부원군파에 숙위공파·경은공파·평숙공파·유후공파가 있으며, 은천군파에는 강소공파·판서공파·충위공파·참의공파·문정공파 등이 있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모두 260명으로 문과 68명, 무과 40명, 사마시 123명, 역과 19명, 의과 2명, 음양과 7명, 율과 1명이다. 2000년 통계청의 발표에 따르면 배천조씨는 총 2만734가구에 6만615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충남 부여군 장암면에 있는 임천조씨 시조 조천혁의 묘. 조천혁은 송나라에서 진사시를 합격하고 벼슬을 하고 있었으나, 할아버지인 위왕 조덕소의 죽음을 보고 고려로 피난하여 임천(부여)에 정착하였다.
임천조씨의 연혁과 인물

중국 송나라 태조 조광윤(趙光胤)의 손자인 조유길(趙惟吉)의 다섯째 아들이 송나라에서 진사시에 합격하고 서두공봉관(西頭供奉官)이 되었으나, 송 태종에게 위왕 조덕소가 화를 입자 숙부인 조유고(趙惟固)와 함께 고려로 피난하여 임천(지금의 부여)에 정착하였다. 고려에 온 후 이름을 조천혁(趙天赫)으로 고쳐 살았다.

그 후 조천혁은 고려 현종 때 강감찬 장군과 함께 거란군을 격파한 공으로 가림백(嘉林伯·임천의 옛 이름)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삼고 임천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임천조씨의 역대 인물로는 조선시대에 감찰을 지낸 조찬(趙瓚), 사성(司成)을 지낸 조원경(趙元卿)이 있고, 보덕(輔德)을 지낸 조지서(趙之瑞), 군자감정을 지낸 조익(趙翊), 도사(都事)를 지낸 조응공(趙應恭), 승지를 지낸 조원(趙瑗) 등이 있다. 특히 조원의 아들 조희일(趙希逸), 손자 조석형(趙錫馨) 등 3대가 시문으로 이름을 떨쳤다. 또 조희진(趙希進)은 부사를 역임하였고, 조원기(趙遠期)는 삼사의 벼슬을 거쳐 황해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조세환(趙世煥)은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삼전도의 굴욕을 보며 벼슬을 단념하였으나, 다시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동래부사로 부임하여 빈민을 구제하고 힘쓰는 등 선정을 베풀었으며, 전라도 관찰사와 승지 등을 역임했다. 영조 때의 조명정(趙明鼎)은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이조판서를 지냈고 조정만(趙正萬)은 형조판서를 지냈다. 그 밖의 인물로는 숙종 때 한문소설인 ‘창선감의록(彰善感義錄)’을 집필한 조성기(趙聖期)와 대사헌을 지낸 조명택(趙明澤)이 있고, 흥선대원군의 사위인 조경호(趙慶鎬)는 일제가 준 남작(男爵)을 거절하고 절의를 지켰다.

임천조씨에서는 조선조에 모두 146명의 과거 급제자가 나왔는데 문과에 42명, 무과에 2명, 사마시에 96명, 율과에 6명이 있다.

임천조씨의 주요파에는 홍의공파(弘儀公派) 장사랑공파(將仕郞公派) 찰방공파(察訪公派) 참봉공파(參奉公派) 봉사공파(奉事公派) 귀성공제일파(龜城公第一派) 귀성공제이파(龜城公第二派) 쌍효자공파(雙孝子公派) 죽음공파(竹陰公派) 진안파(鎭安派) 강진공제일파(康津公第一派) 강진공제이파(康津公第二派) 용천파(龍川派) 도위공파(都尉公派) 단포공파(丹圃公派) 지족당부여파(知足堂扶餘派) 지족당진주파(知足堂晉州派) 등이 있으며 2000년 통계청의 발표에 따르면, 총 3476가구에 1만104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한국다문화센터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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