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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인희칼럼] 호국보훈의 달, 6월의 단상(斷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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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 ‘홀로코스트’ 잊지 않아
다양한 의견, 갈등으로 봐선 안돼
6월이다. 6일이면 58번째 현충일 기념식이 치러지고, 15일엔 남북정상회담 13주년을 기억할 것이며, 25일엔 한국전쟁 63주년을 되새기게 될 것이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던 역사학자 에드워드 핼릿 카의 명언은 특별히 한국적 상황에서 빛을 발하는 듯하다. 한때는 5·16 뒤에 ‘혁명’이란 의미가 부여됐건만 어느 새 그 뒤엔 ‘실패한 쿠데타’의 오명이 붙고 조국 근대화를 명분으로 한 개발독재와 유신체제를 야기한 근원으로 자리매김되고 있음에랴.

역사적 사건의 의미가 새롭게 재해석되는 과정 속엔 다양한 사회집단 간 이해관계의 충돌이 숨어 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순 없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의 역사적 의미 평가 작업에 담긴 전부 아니면 전무(全無), 도 아니면 모 식의 단순명료한 이분법만큼은 필히 경계해야 한다.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사회학
이 대목에서 지금도 지치지 않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홀로코스트의 의미를 되새김질하고 있는 유대인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신들의 처참했던 역사를 성찰하는 과정에서 서구 열강의 세력권 다툼으로 어이없이 희생된 비극의 역사가 드러나기도 했고, 가장 비인간적인 수용소 상황에서 오히려 인간애의 정수가 꽃피던 감동을 경험하기도 했다. 왜 아무도 저항하지 않았는가, 뼈아픈 탄식과 반성이 이어졌는가 하면 지극히 나이브했던 당시의 현실인식에 대한 통렬한 자성도 등장했다. 혹 집단학살의 공포가 그 형태만 바뀌었을 뿐 모습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은 채 우리의 삶 속을 파고드는 건 아닌지 끊임없이 경계하며 역사의 오류가 반복되지 않기를 갈망하는 그들 앞에서 숙연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러고 보면 우리 과거는 전면적 부인(否認)의 대상이 되거나, 일정한 시간이 흘러 ‘이제야 말할 수 있다’는 군색한 변명을 반복해온 듯하다. 과거가 늘 극복의 대상이 되는 역사라면, 역사 속 오류가 스캔들이나 가십 수준에서 기록되는 사회라면 별 희망이 없을지도 모를 일이다. 과거는 오늘에 비추어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아 마땅하고, 역사 속 오류는 언제라도 바로잡을 수 있는 용기가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아 마땅할 것이다. 시간이 지나 폭로의 형식으로 역사가 기억되는 사회일수록 억압적 독재 사회의 전형임은 세계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지 않던가.

이제 6·15의 의미와 6·25의 위상이 상호배타적 지점에서 설정돼선 안 되며, 어느 한편이 지나치게 윤색되거나 평가절하되는 오류도 경계해야 하리란 생각이다. 나아가 하나의 사건을 두고 사회 전체 구성원이 일사분란하게 동일한 의견을 갖는 상황은 내편 네편 가려 분열되는 상황보다 더욱 암울할지도 모를 일이기에 6·15에 대한 해석과 6·25에 대한 의미부여 작업을 두고 다양한 의견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아직도 다양한 의견 표출을 갈등으로 받아들여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민주주의 사회로 가는 길에 다양한 이해관계의 충돌, 이견의 조정과 협상, 이를 위한 공정한 룰의 정립은 기본이다. 설혹 남남갈등이 분출된다 해도 갈등 자체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갈등을 합리적으로 조정하고 현명하게 해소할 수 있는 장치를 갖추지 못한 우리 자신의 불합리함·미성숙함을 반성할 일이다.

이제 6·25의 의미가 6·15에 의해 거꾸로 6·15의 의미가 6·25에 의해 어떻게 재조명되고 재해석될 수 있을지 이데올로기의 스펙트럼을 그대로 펼쳐 놓고 공론을 벌이자. 이데올로기의 스펙트럼이 다양할수록 이분법의 경직성은 완화되고, 과거의 오류를 반복하는 악순환의 고리도 하나씩 풀리리라.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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