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정호진의 예술과 디자인의 경계에서] <25·끝> 예술가의 똥

관련이슈 정호진의 예술과 디자인의 경계에서

입력 : 2012-01-15 21:34:20 수정 : 2012-01-15 21:34:20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관심·논란의 중심이 될수록 ‘예술작품’은 가치 상승 이탈리아 밀라노의 유명한 예술가 피에로 만조니는 1961년 ‘예술가의 똥’이라는 라벨이 붙은 캔 90개의 작품을 만들어 같은 무게의 금값을 받고 팔았다.

“‘예술가의 똥’은 왜 ‘예술가의 똥’이라고 불릴까요? 왜냐하면 바로 약사의 똥도 아니고, 비평가의 똥도 아니고 변호사의 똥도 아니기 때문이죠. 물론 비평가가 작품에 가치를 부여하는 거예요.”

언제나 논란을 몰고 다니는 이탈리아의 비평가 비토리오 스가르비의 말이다. 그는 만조니의 작품을 예로 들어 현대미술에서 시장이 형성되는 과정과 맹점을 재미있게 설명해 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미술작품 전문 판매 TV채널에서였다.

“논리적으로 맞는 말이잖아요? 제가 만약 예술가라면 제 똥은 당연히 문자 그대로 ‘예술가의 똥’이 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발생하죠. 똥을 생산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이 그걸 팔겠다고 시장에 들고 나온다면 인플레이션만 생기지 거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겠죠. 그러니 예술가가 아닌 사람은 모두 제외하기로 하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생산한 똥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규칙을 정하면 되죠. 여기서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예술가의 똥’은 이미 만조니가 써먹었잖아요? 그게 언제죠? 1961년이에요. 벌써 50년이나 지난 케케묵은 얘기라는 겁니다. 이걸 다시 만들어 팔기 위해서는 이게 새롭다는 인식을 심어줘야 해요. 그러니 좀 더 최근의 똥일 필요가 있겠어요.

그럼 최근에 생산된 것으로 하기 위해 당신이 만조니를 계승하는 제자라고 칩시다. 당신은 예술가인 겁니다. 우리가 당신을 쇼 프로그램 사회자나 가정 주부라고 부르지 않고 예술가라고 부른다면 당신은 바로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거예요. 우리가 똥을 생산하는 사람을 소수로 규정하고, 이 상황에서는 바로 당신이죠, 그리고 똥의 생산량도 한정한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만조니가 했던 것처럼 100개씩 하지 말고 아예 10개로 합시다. 만조니가 ‘예술가의 똥’을 생산하고 세상을 떠난 지 50년 만에 만조니의 정신을 계승하는 몇 안 되는 제자 중의 하나인 당신이 10개의 한정판 ‘예술가의 똥’을 만들어 낸 겁니다.

‘예술가의 똥’. 1961년 작. 30g의 내용물을 담은 캔. 에디션 90점. 4개국어(이탈리아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로 쓰여있다. 만조니의 동료작가 보나루미는 실제로는 만조니가 석고를 넣었다고 주장했다.
미술사에는 이런 리바이벌이 흔하게 있어왔어요. 네오다다를 보세요. 이런 리바이벌은 충분히 주목을 받아요. 이번엔 10개밖에 되지 않으니 하나당 가격을 1만5000유로쯤 붙여도 될 겁니다. 봐요, 시장이 형성되죠? (…) 그게 ‘똥’이든 뭐든지 간에 더 논란이 되고, 더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수록 ‘예술작품’이 됩니다. 벌써 여기서 우리가 이 사건에 대해 떠들고 있잖아요? 그 다음에 신문과 방송에서 다뤄지고, 그렇게 작품이 홍보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재료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도 없던 것이 논란의 중심에 서면서 가격도 천정부지로 뛰어오르게 되는 거죠.”

만조니는 캔에 ‘예술가의 똥. 정량 30g. 원상태로 보존됨. 1961년 5월에 생산 포장됨’이라고 써넣고 사인을 했다. 90개의 캔은 각각 차례대로 숫자가 매겨졌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알비솔라 마리나의 페셰토 갤러리에서 처음으로 선보였다.

“아니, 네가 그 애의 진정한 친구라면 그런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말렸어야지. 그걸 사주며 부추기다니!”

만조니의 어머니는 ‘예술가의 똥’ 사건이 있은 후 그의 친구 제킬로를 찾아와 엄하게 꾸짖었다. “무척 화가 나서 가버리시더라고요. 그 후로는 길에서 절 봐도 아는 척을 않으셨죠. 피에로가 죽고 나서도 몇 년이 지난 70년에야 화해를 할 수 있었어요.” 훗날 이탈리아에서 꽤 알려진 바리톤으로 성장한 주세페 제킬로는 당시 만조니의 친구이면서 후원자이기도 했다.

만조니의 작업실이 있었던 건물. 제킬로는 그의 작업실을 구입해 만조니의 친구들이라는 협회를 만들었다. 건물 입구 왼쪽에 그를 기념하는 대리석 현판이 보인다.
만조니는 아고스티노 보나루미, 엔리코 카스텔라니, 엔리코 바이 등의 작가들과 어울려 다니며 활동을 했고 브레라 예술대학 근처의 허름한 작업실에서 근근이 생활했지만 실은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본명은 메로니 만조니 디 키오스카 에 포조이올로 백작. 그러니 그의 어머니의 눈에 만조니가 하는 짓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만조니가 사망한 후 제킬로가 그의 유작을 모아 가족에게 연락을 했을 때에도 어머니는 관심이 없으니 버려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약 2년 후 피에로 만조니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그가 30세도 채 되기 전의 일이다. 그와 그의 작품은 그가 사망한 후부터 유명해지기 시작했고 작품의 가격도 빠른 속도로 치솟았다.

런던의 테이트 갤러리가 2003년 5만2000달러를 주고 4번 넘버가 매겨진 캔을 사들였고, 2007년에는 18번 캔이 밀라노 소더비 경매에서 12만4000유로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 이듬해 밀라노와 런던에서 57번 캔과 83번 캔이 8만4750유로와 9만7250파운드에 거래되었다.

“우린 열정적으로 전시를 했지만 하나도 팔지를 못했어요. 친구들이나 전시장에 와서 같이 먹고 마시고 즐겼을 뿐이지 어쩌다 우연히 들르는 친구의 친구가 아니면 늘 우리들끼리의 파티나 마찬가지였죠….”

브레라 거리에 있는 바, 자마이카. 이름은 그대로 붙어 있지만 예전의 모습을 찾기는 힘들다. 만조니의 사인은 심장마비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여자 친구였고 사망 당시 현장에 있었던 난다 비고에 따르면 그는 간경변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1959년에 만조니, 카스텔라니와 함께했던 전시를 회상하며 보나루미가 한 말이다.

“전시가 끝나고 작품을 다 싸놓은 뒤 우리는 늘 가던 대로 브레라 거리의 자마이카로 가서 비앙키노(가볍게 마시는 화이트와인을 이르는 이탈리아어)를 마셨어요. 거기서 로마노 로렌친을 만났죠. 그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가끔 사주는 열정적인 컬렉터였어요. 그런데 우리 작품에는 관심이 없더라고요. 우리는 작품을 반으로 깎아주겠다고 흥정을 벌이다가 그냥 선물로 주겠다고까지도 했지만 로렌친이 거절을 하는 거예요. 그때 우리 모두 얼마나 실망을 했던지…. 그때 만조니가 ‘이 나쁜 밀라노 부르주아 자식들은 똥만 좋아하나 봐!’라고 외쳤던 게 기억이 나네요.”

며칠이 지나 만조니의 전화를 받고 그의 작업실에 들렀던 보나루미는 만조니가 웃음을 흘리며 고기통조림 캔에 종이를 바르고 거기다 ‘예술가의 똥’이라고 써서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예술가의 똥’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사실 그 안에는 석고가 들어 있어요. 진짜 똥이 들어 있다면 그동안 캔이 녹슬거나 가스로 폭발하거나 하지 않았겠어요?’ 그래도 그는 그걸 증명하기 위해 그 비싼 캔을 뜯는 짓을 하지는 않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플래시 아트의 디렉터 폴리티는 2007년 8/9월 호에 ‘피에로 만조니? 브레라 거리의 술꾼’이라는 제목으로 피에로 만조니의 위작이 원작의 숫자를 훨씬 웃돌고 있으며, 그 덕분에 국제 미술시장에서 작품 가격이 높게 평가받을 수 있었다고 쓴 바 있다. 또한 그는 만조니재단에서 편찬한 카탈로그 레조네가 검증을 제대로 거치지 않은 작품을 수백 점이나 포함하고 있다고 했다가 재단의 변호사에게 경고장을 받기도 했다. 만조니재단은 작고한 작가의 형제들인 엘레나 만조니와 주세페 만조니가 92년에 설립한 기관이다. 엘레나와 주세페 만조니는 변호사를 통해 만조니는 술꾼이라고 불릴 만큼 술을 즐기거나 한 적도 없을뿐더러, 만조니와 만났다는 어떠한 증거도 갖고 있지 않은 폴리티가 주장하는 만조니의 작품 숫자인 400∼500점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들은 재단의 카탈로그 레조네가 증명하는 1144점이 이미 원작으로 증명된 바 있고, 그 외 20점의 프로젝트와 66점의 작품이 검증을 받는 과정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가족의 후원을 받아 제르마노 첼란트가 73년에 펴낸 카탈로그 레조네는 750여점만의 작품을 포함하고 있었고, 2004년의 보완판에서는 1000점이 넘게 늘어났다는 점이 학계 내외에서 여러 차례 지적을 받았다.

카탈로그 레조네는 번역을 하자면 ‘분석적 작품 총서’쯤 된다. 보통 작가가 사용한 재료나 기법, 제작연도 등의 기본적인 정보부터 작품의 전시 이력, 판매, 소장 이력 등의 세밀한 정보를 싣고 있는 것은 물론 작품이나 작가가 인용된 서적 및 참고자료도 자세히 정리되어 포함된다.

“제르마노 첼란트가 전화를 걸어왔어요. 만조니의 카탈로그 레조네를 준비하고 있으니 제가 소장하고 있는 만조니의 작품을 알려달라고요. 전화번호는 만조니의 어머니가 주셨다고 하더군요. 당연히 저는 작품을 보여줄 테니 편한 시간에 찾아오시라고 했죠. 그런데 사진만 보내주면 된다고 잘라서 말하더군요.”

주세페 제킬로는 그가 요청한 대로 사진만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면서 실제로 작품을 보지 않고 어떻게 원작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덧붙였다.

제킬로는 친구였던 만조니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만조니가 동료 작가들과 전시를 하고 작품을 한 점도 팔지 못해 우울해할 때에도 그가 나서서 한두 점씩 사주곤 했다고 한다. 만조니가 사망한 직후에 그의 작업실에 찾아갔던 제킬로는 침대 매트리스 업자가 들어가려는 것을 알고 두 배의 돈을 치르고 그 작업실을 사들였다. 그는 만조니의 작품 49점을 비롯해 2000여점의 현대미술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컬렉터이다.

그는 만조니의 가족이 수백 점의 위작이 유통되는데도 조치를 취하지 않고 방치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만조니의 카탈로그 레조네가 담고 있는 문제를 시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그의 소장품은 만조니 가족으로부터 원작으로 인정을 받지 못했고 위작을 유통한 장본인으로 몰리는 수모를 당했다. 누명을 벗기 위해 블로그를 통해 활발히 활동하던 그는 지난해 11월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Achrome’. 1958∼59년 작. 만조니는 이브 클라인의 모노크롬을 보고 색이 왜 필요하냐며 색(chrome)에 부정을 뜻하는 a- 접두사를 붙인 Achrome을 만들어냈다.
만조니 생전에 같이 활동했던 동료 작가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그가 300∼400점 이상 작품을 제작할 수 있었을 리 없다고 주장했다. 2007년 프란체스코 보나미는 베니티 페어에서 만조니 영혼을 불러다 작품을 다시 찍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제르마노 첼란트가 내놓은 카탈로그 레조네가 어처구니없는 숫자놀음을 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프란체스코 폴리 역시 그의 저서 ‘현대미술의 시스템’에서 이제 막 작가로서 발돋움을 하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작가치고는 카탈로그 레조네가 상당한 양을 자랑한다고 지적하며, 살아서보다는 죽어서 더 많은 작품을 만들어낸 것 같다고 의심을 표했다.

안젤라 바테제는 일 솔레 24지에 기고한 글에서 만조니는 몇 점 되지 않는 작품을 남겼는데 사후에 그 숫자가 급격히 늘어났다고 썼다. 모두가 두 팔 걷고 보물찾기에 나선 것 같다고 묘사한 그녀는 당시 천재적인 활동으로 남다르게 앞서간 만조니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는 세계 주요 박물관에 두루두루 소장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그가 남긴 몇 안 되는 작품으로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위작의 압도적인 숫자. 위작 덕분에 그의 업적이 알려질 수 있었다는 게 아이러니한 미술 시스템의 현실이다.

위작과 원작을 가리는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얼마 전 소더비 런던에서 만조니의 ‘Achrome’은 110만5250파운드(약 20억원)에 거래되었다.

조각·미술설치가(밀라노) hojin00@gmail.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아일릿 원희 '시크한 볼하트'
  • 아일릿 원희 '시크한 볼하트'
  • 뉴진스 민지 '반가운 손인사'
  • 최지우 '여신 미소'
  • 오마이걸 유아 '완벽한 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