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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진의 차맥]〈15〉 한국차의 신화학 다시쓰기 ③ 매월당 초암차 일본으로 건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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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1-06-27 17:13:28 수정 : 2011-06-27 17: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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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연구가 최석환씨가 발견… 차 헌다 다정·사당 건립 시급
당시 염포는 조그마한 항구… 다수 日승려들 만나 차 나눠
매월당은 염포(鹽浦)에서 가까운 경주 남산에 있었던 관계로 자주 염포에 들렀으며, 일본인 스님과도 접촉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도이거(島夷居)’란 시를 썼다. ‘매월당집’ 권 12 ‘유금오록(遊金鰲錄)’에 실려 있는 ‘도이거’란 ‘섬나라 오랑캐가 사는 곳’이란 뜻이다.

“바닷가에 생업을 도모하는 집들/ 띠집이 십여 가구가 되네./ 성미 급한 고깃배는 작고/ 풍속이 달라 말씨가 거만하구나./ 고향은 멀어 푸른 하늘 가에 있고/ 몸은 푸른 물가에서 살아간다네./ 우리 임금님이 교화 속에 들어왔으니/ 주상께서 바로 긍휼히, 가상하게 여기네.”

매월당이 초암다도를 완성한 장소로 알려진 ‘불일암(佛日庵)’의 위치가 차연구가 최석환씨에 의해 발견되는(2007년 3월) 등 매월당 차세계의 복원은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불일암은 현재 울산 현대자동차 공장 하치장에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다행히 현대는 그곳을 유적지로 남겨두었다. 당시 염포는 조그마한 항구였다. 지금은 암자가 없어지고 남아 있는 고목만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차인들은 이 차유적지 복원운동을 벌여야 할 것이다.

염포는 삼한시대에는 염해국(鹽海國)이라는 부족국가가 번성하였고, 심청(深靑)골의 맑은 물과 염전이 있어 소금이 풍부한 해상활동의 중심지였다. 예나 지금이나 요충지는 언제나 번창하게 마련이다. 매월당은 금오산에 은거하면서 울산 염포를 자주 드나들었던 것 같다. 그의 울산 ‘태화루(太和樓)’라는 시에는 “고루(高樓)에서 섬 오랑캐 사는 물가를 바라보니 창해는 가이없이 밤낮으로 떠 있구나”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곳 촌로의 증언에 따르면 “저기 보이는 두 소나무는 1950년까지만 해도 성안마을을 지키는 사당이었지요. 당시 이 마을의 노인들이 그 정자나무 밑에서 바둑을 두며 소일했었습니다”라고 말한다.
매월당이 초암차를 완성한 곳으로 알려진 울산 염포 불일암 자리. 지금은 현대자동차 공장 하치장이 되어있다.
‘차의 세계’ 제공
불일암의 중요성은 한국 차문화가 체계화되면 될수록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적어도 차인들이 1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혹은 간소하게 차를 헌다할 수 있는 다정이나 사당 등의 복원이 요청된다. 다행히 현대자동차의 배려로 그나마 유적지가 보존된 것은 하늘이 도운 일로 생각된다. 다정이나 사당이 복원되면 이렇게 시를 한 수 붙이고 싶다.

“한 차(茶)는 안으로 우주를 품고/ 또 한 차(車)는 밖으로 지구를 윤회하네./ 한자리에 구심력과 원심력이 만났으니/ 청한자(淸寒子), 영원한 다신(茶神)이시여!/ 문득 달무리로 둔갑한 차호(茶壺) 안에/고차수는 계수되어 달 속에 숨는다./ 그대는 어찌 야밤에 외로운 후예를 희롱하는가.”

매월당의 시문은 1583년 선조의 명으로 ‘매월당집’으로 편찬되어 나왔다. 서문은 이산해(李山海)가 썼고, 전기는 율곡 이이(李珥)가 썼다. 이산해는 서(序)에서 “김시습은 문장과 언어를 통해 우주에 크게 명성을 떨친 사람이다”라고 했고, 율곡은 전기에서 “심유적불(心儒跡佛)한 인물이다”라고 했다.

매월당의 저작은 시와 산문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김안로(金安老)가 쓴 야담집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에 보면 “매월당은 금오산에 들어가 책을 써서 석실에 넣어두고 이르기를 ‘후세에 반드시 나를 알아줄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라는 기록도 있다. 남효온(南孝溫)이 당대 50여명의 명사를 기록한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에는 “매월당이 쓴 시편은 수만편에 이르지만 널리 퍼져나가는 동안에 대부분이 흩어져 사라져버렸고, 조신과 유사들이 몰래 자기의 작품으로 만들어버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경주 남산 용장사지 삼층돌탑과 석불좌상(삼륜대좌불).
‘차의 세계’ 제공
또 미수(眉?) 허목(許穆)이 편찬한 ‘미수기언’(眉?記言)에는 “매월당의 저서는 ‘사방지(四方志)’ 1600편과 ‘기산(紀山)’ ‘기지(紀地)’ 200편이 있으며, 따로 시권(詩卷)이 있다”고 하였다. ‘동경지(東京志)’에는 “사유록, 태극도설 두 책의 판목이 경주 정혜사에 있다”고 하였으며, “매월당은 성리(性理)·음양(陰陽)·의복(衣服) 등 백가(百家)에 통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그 문장이 호한하고 자사하여 그의 저서 중 ‘매월당전집’ ‘역대연기’ ‘금오신화’ 등이 세상에 널리 간행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선조에 의해 간행된 갑인자본 매월당집은 23권 11책이다. 이것의 완질은 일본의 호사분코(蓬左文庫)에 수록되어 있을 뿐이다. 갑인자 본에 보유편을 붙여서 후손인 김봉기가 편찬한 신활자본(1927년)이 널리 보급되어 있다. 매월당의 시문이 모두 남아 있으면 아마도 우리나라 선비의 기린아였음에 틀림없다.

매월당은 생존시 이름난 선비들과의 만남에서 항상 상석에 앉았던 것으로 전한다. 그의 높은 학문을 숭상한 탓이다. 그가 남긴 수많은 시 중에서 오늘날 우리가 접할 수 있는 60여 편의 다시에는 유불도(儒佛道)를 넘나드는 내용이 많다.

“작설의 향기로운 순을 손수 마음껏 달이니/ 그 사이 재미가 자못 깊이 들었구나./ 누가 온 세상과 더불어 산다고 하는가./ 나는 평생토록 호탕하게 살았다네./ 도학은 마음 따라 상인(上人)이 얻을 수 있으니/ 천지의 기미(機微)가 어찌 말로 전해지겠는가./ 안회의 표주박과 증점의 거문고에 회동할 자 없지만/ 절로 풍류가 눈앞에 충만하네.” -‘종능산에 거처하는 시에 화답함’(和鍾陵山居詩)

이 시에서는 차인으로서, 도인으로서, 유가로서 매월당의 참모습이 한꺼번에 드러난다. 매월당은 최치원 이후 천재일우의 기회로 솟아난 유불선을 포함하고, 원융회통한 기인(奇人)이며, 신인(神人)이다.

흔히 우리 역사에서 3대 천재라고 하면 원효와 최치원과 김시습이다. 여기에 원효를 빼면 시서화의 3절로 불린 조선 후기의 신광수(申光洙:‘석북집’ 16권 8책과 석북과시집 1책을 남겼다. 소설가 이광수는 신광수의 이름을 따서 필명을 이광수라고 하였다)를 넣는다. 매월당에 대한 연구는 하면 할수록 우리 문화의 핵심과 관련되는 내용을 건질 수 있을 것이다. 매월당의 천재성은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위의 시에 나오는 다풍(茶風)은 일본에서 발달한 소안차의 광경과 유사하며 초암차는 사치스런 귀족풍의 차와 달리 질박함을 추구하는 다도이다.

매월당은 이 밖에도 여러 일본 승려들을 만났는데 그 이름이 준상인(俊上人), 근사(根師), 민상인(敏上人) 등으로 표현된다. 일본 승려와 당시 조선의 선비들은 종종 교분을 이루었다. 목은 이색도 일본 승 윤중암(尹中菴)과 홍혜(弘慧)를 만났으며, 일본 승려와 차를 나눈 기록이 있다.

매월당이 차시를 남긴 절만 해도 장안사·가성사·내소사·견함사·용천사·낙산사·보현사 등이 있으며 선승과 차 자리를 같이한 시가 많이 전한다.

매월당은 이 밖에도, 특히 신라 내물왕(17대)∼눌지왕(19대) 때 충신 박제상(朴堤上)이 쓴 부도지를 부활시킨 장본인이다. 그는 ‘징심록(澄心錄)’ 15지(誌)와 박제상의 아들인 백결선생이 보탠 ‘금척지(金尺誌)’와 자신이 보탠 ‘징심록추기’ 등 총 17지(책)를 전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부도지의 존재도 모를 뻔했다. 부도지는 바로 징심록의 제1지이다.

매월당은 기거한 경주 남산 기슭의 용장사는 남산의 자연풍광과 어우러진 그의 선가적이고 초탈한 차풍을 이룩한 백미이다. 일본 승려에게 큰 감동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이곳에서 가까운 염포(부산, 웅천과 함께 삼포에 해당)에 더러 들른 것 같다.

매월당이 쓴 소설 ‘금오신화’ 목판본이 1653년 일본에서 처음 간행되었는데, 그의 소설 원본이 일본 승려들에 의하여 일본으로 흘러나간 것으로 비정된다. 16세기에 일어난 이러한 일들은 매월당과 일본과의 관계, 소안차의 한국 원조설을 더욱 강화한다.

우리센케 15대 종장이었던 센겐시쓰(千玄室)는 “일본의 다도는 한국을 거쳐 온 것이다”라고 실토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선비 다풍이 성행하면서 손수 불을 피워 차를 끓여 마시며, 다시(茶詩)를 통해 다도의 오묘함과 즐거움을 함께 나누었다. 오늘날 차의 성품을 통해 이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자 하는 이들이 증가하고 있는데, 많은 다인의 모범이 되는 인물의 중심에 매월당 김시습을 들 수 있다. 매월당이야말로 다성(茶聖), 다선(茶仙)이라고 해도 하나도 과찬이 아니다.

우리 역사에서 초암차가 만들어지기까지 길고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멀리는 신라의 원효방(元曉房)에서 가까이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죽로다실(竹爐茶室), 다산(茶山)의 다산초당(茶山草堂), 초의스님의 일지암(一支庵), 다산의 제자 황상(黃裳)의 일속산방(一粟山房)에 이른다. ‘초(草)’라는 개념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정신과 세속에서 일탈하는 정신이 복합적으로 숨어 있다. 잠시 우리가 잃어버렸을 따름이다.

고려 중엽 이규보는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에서 부안의 원효방을 언급하였고, 겨우 8척(2.4m)쯤 되는 동굴에 한 늙은 스님이 누더기 옷을 입고 원효의 초상을 모시고 수행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작고 초라한 암자의 전통은 당시부터 있었다. 우리 차 유적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신라 시대의 강릉 한송정(寒松亭) 역시 모옥(茅屋)이나 초당(草堂)의 전통을 잇는다. 고려 시대의 선비들과 귀족들도 정원을 만들고 정자를 세웠다. 김치양(金致陽)·이공승(李公升)·최충헌(崔忠獻)·최우(崔瑀)의 그것은 이름이 높다. 특히 최충헌의 모옥(茅屋)은 바로 초옥(草屋)이다. 이규보의 다시(茶詩)에는 초당이 나온다.

문화평론가 pjjdisc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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