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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 역사에서 길을 찾다]<12>법치의 틀잡은 조선의 헌법 경국대전

관련이슈 신병주의 '역사에서 길을 찾다'

입력 : 2008-07-16 02:16:35 수정 : 2008-07-16 02: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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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에게 출산휴가 80일을 허하노라∼
◇‘경국대전’이 육전 체제로 구성된 것은 국가의 중앙·지방의 정치구조와 행정조직이 모두 6조 체제로 구성됐기 때문이다. 그림은 조선시대 제주목 관아를 묘사한 모습.
7월 달력을 보면 그동안 익숙했던 공휴일 하나가 빠져 아쉬움을 자아낸다. 7월17일 제헌절이 올해부터 공휴일에서 사라졌다. 주 5일 근무제가 실시되는 마당에 너무 많은 공휴일은 업무의 연속성을 저하한다는 이유가 컸다. 4월5일 식목일, 10월9일 한글날에 이어 제헌절도 구조조정(?)에 들어갔고, 올해 처음으로 공휴일에서 탈락한 것이다. 1948년 7월17일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한 날의 의미가 퇴색했다는 지적도 많고, 일부에서는 ‘그놈의 헌법 때문에’라는 발언을 한 노무현 전 대통령과 연관지어 전 정부에서 제헌절을 공휴일에서 제외시킨 것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는 사람도 있다.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성문 헌법의 유무는 조선시대와 고려시대를 가르는 주요한 기준이 되었다. 기존의 관습법이나 중국 법률에 의존하던 단계에서 벗어나 조선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성문 헌법인 ‘경국대전’이 완성되어 국가 운영의 체계가 잡혀갔기 때문이다. ‘경국대전’은 성리학을 이념으로 표방한 조선이라는 국가의 헌법으로서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많은 한계점도 있다. 과부의 재가를 금지한 것이나, 서얼 자손에 대한 영구한 과거 금지 조치, 노비에 대한 매매의 허용 등 시대적 한계성을 보이는 내용들도 다수 있다. 그러나 ‘경국대전’이 만세 불변의 법전을 만들기 위해 기울인 노력의 과정이나 오늘날의 관점에서도 상당한 합리성을 보인 규정들이 다수 존재했다는 점 등은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1. ‘경국대전’의 모태 ‘조선경국전’
◇보물로 지정된 경국대전의 예전.

‘경국대전’ 역시 현대 대한민국의 헌법처럼 제정되는 과정이 순탄하지가 않았다. 조선의 건국은 정치, 사회, 경제, 문화의 여러 분야에 걸쳐 고려시대와는 다른 변화를 가져왔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주목되는 것은 성문 법전의 편찬이었다. 고려시대의 일상생활을 규제한 법률은 중국에서 수입된 법률과 전통적으로 관례화된 관습법이었다. 태조는 즉위 후 내린 교서에서 ‘의장(儀章)과 법제는 고려의 것을 따르되 법률을 정하여 모두 율문(律文)에 따라 처리함으로써 고려의 폐단을 밟지 않을 것’을 천명하였다. 즉위 교서의 이러한 방침은 건국의 주역 정도전에 의해 즉시 수행되었다.

1394년(태조 3)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을 저술하여 태조에게 바쳤다. 정보위(正寶位), 국호, 정국본(定國本), 세계(世系), 교서(敎書) 등 5항이 있으며, 그다음 본편격으로 치전(治典), 부전(賦典), 예전(禮典), 정전(政典), 헌전(憲典), 공전(工典)의 6전 체제로 구성되었다. ‘조선경국전’은 조선 건국의 이념과 통치방향을 제시한 책으로, 훗날 조선의 헌법이 되는 ‘경국대전’의 모태가 되었다. 먼저 ‘조선경국전’의 핵심 내용을 살펴보자.

“총재(재상)에 그 훌륭한 사람을 얻으면 6전(典)이 잘 거행되고 모든 직책이 잘 수행된다. 그러므로 ‘인주(人主)의 직책은 한 사람의 재상을 논정(論定)하는 데 있다’ 하였으니, 바로 총재를 두고 한 말이다.”

“총재는 위로 군주를 받들고 밑으로는 백관을 통솔하여 만민을 다스리는 것이니, 그 직책이 매우 큰 것이다. 또 인주의 자질에는 어리석고 현명한 자질도 있으며 강력하고 유약한 자질도 있어서 한결같지 않으니, 총재는 인주의 아름다운 점은 순종하고 나쁜 점은 바로잡으며….”
◇조선 각 고을의 형벌이나 재판 등은 당시 헌법이라 할 수 있는 경국대전의 형전의 내용에 따랐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의 ‘총서’에서, 군주는 현명함과 무능함의 차이가 있지만 재상은 가장 능력 있는 자가 선발될 수 있기 때문에 재상 중심으로 국가를 이끌어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조선경국전’에는 능력 중심의 시험제도에 의한 관리 선발, 국가의 수입을 늘리기 위한 군현 제도와 호적 제도의 정비, 언로의 개방, 사대외교의 중요성, 인(仁)에 바탕을 둔 도덕정치의 지향 등 고려 말기의 사회모순을 극복하고 건국한 조선사회가 가야 할 방향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2. ‘경국대전’ 편찬을 위한 지난한 작업

태조 때의 영의정 조준은 ‘조선경국전’과 보조를 맞추어 그 당시까지 10여년간 공포돼 법령으로 기능하고 있거나 앞으로 준행해야 할 법령을 수집, 분류해 이를 ‘경제육전’이라 이름하였다. ‘경제육전’은 우리 역사상 명백한 최초의 성문 통일 법전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경제육전’은 한문 이외에 이두와 방언을 섞어 편찬하여 일반 백성들도 쉽게 법전을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태종대에는 이전의 6전에서 미비한 점을 보완하여 ‘원육전’ 3권과 ‘속육전’ 3권으로 만들었으며, 1433년(세종 15)에는 황희 등이 세종의 재가를 얻어 ‘신찬경제육전’을 편찬하였다. 건국 이후 태조에서 세종대까지는 기본적으로 선왕대에 만들어진 법전을 존중한다는 ‘성헌존중주의(成憲尊重主義)’를 바탕으로 법전이 편찬되었다. 그러다가 원전(原典), 속전(續典)을 비롯한 모든 법령을 전체적으로 조화시켜 통일적인 법전을 편찬하자는 시대적 요청 속에서 ‘경국대전’을 편찬하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 한 양반이 고을 관찰사에게 사노에 대한 분쟁 해결을 요청하며 올린 문서. 조선시대에는 법전을 통하여 백성을 다스려 왔고, 고을의 수령에게 민원을 제기하는 소지 및 관찰사에게 제기하는 의송 등 여러 종류와 단계의 민원 소송을 통해서 백성의 억울함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세조는 즉위 후 양성지의 건의를 받아 법제의 기본적인 조사 및 확립의 필요성을 인식한 후 국가적으로 편찬 사업을 주도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1457년(세조 3) 육전상정소(六典詳定所)를 두고 ‘경국대전’의 편찬을 시작하여, 호전과 형전을 차례로 완성하여 시행하였다. 1466년 말 재교열을 거쳐 완성한 ‘경국대전’을 2년 뒤부터 시행하기로 하였으나 세조의 죽음으로 ‘경국대전’은 다시 손질되었고, 마침내 성종대인 1482년 전체적인 수정 작업을 완료하고 1485년 1월부터 법률의 시행에 들어갔다. ‘경국대전’이 완성되기까지 이처럼 많은 진통이 따랐던 것은 영구히 지킬 법전을 만들려는 의지가 컸기 때문이었다. ‘경국대전’은 이전, 호전, 예전, 병전, 형전, 공전의 6전 체제로 완성되었다. 1394년 ‘조선경국전’에서 시작된 조선의 법전 편찬 작업이 1485년 ‘경국대전’으로 그 완성을 보았으니, 약 90년의 세월이 투자된 셈이었다.

조선왕조에서는 ‘경국대전’ 이후 ‘속대전’(영조대) ‘대전통편’(정조대) ‘대전회통’(고종대) 등 3차례의 법전 편찬이 더 이루어졌다.

그러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경국대전’의 골격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즉 ‘대전회통’의 경우 ‘경국대전’부터 실렸던 조문은 ‘원(原)’으로, ‘속육전’에서 보충된 내용은 ‘속(續)’으로, ‘대전통편’의 보충 내용은 ‘증(增)’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전회통’에 첨가된 내용은 ‘보(補)’로 표시함으로써 조선시대 4대 법전의 내용과 변화상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다. 조선시대 법전의 첫 출발점이었던 ‘경국대전’의 체제가 처음부터 짜임새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3. ‘경국대전’에는 어떠한 내용이 담겨 있을까

‘경국대전’에는 총 319개의 법조문이 이전, 호전, 예전, 형전, 병전, 공전의 6전 체제로 구성되어 있다. 이전은 내명부와 외명부, 중앙과 지방의 관제, 관리의 임면에 관한 규정 등을 기록하고 있는데, 첫 부분에 빈(정1품), 귀인, 소의, 숙의, 소용, 숙용, 소원, 숙원 등 후궁들의 품계와 상궁(5품) 등 궁중의 전문직 여성들의 품계가 기록된 점이 흥미롭다. 여성들의 품계가 법전의 첫 부분에 기록된 것은 이들이 왕과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기 때문이었다.

호전은 세금제도와 관리들의 녹봉, 토지, 가옥, 노비 매매 등에 관한 사항으로 오늘날 재정경제부 등 경제 관련 부처에서 관장하는 사항들을 주로 기록하고 있다. 예전은 과거제도, 외교, 제례, 상복, 혼인 등에 관한 사항으로 오늘날 문화체육관광부나 외교통상부의 추진 업무와 밀접히 관련된다.
◇‘경국대전’의 모태라 할 수 있는 ‘조선경국전’을 저술한 정도전

이외에 오늘날 법무부의 소관 사항에 해당하는 형벌, 재판, 노비, 재산상속법에 관한 규정을 정리한 형전, 국방, 군사에 관한 사항을 기록한 병전, 도로, 교통, 건축, 도량형 등 건축과 산업 전반에 관한 사항을 기록한 공전의 순서로 ‘경국대전’은 구성되어 있다. ‘경국대전’이 육전 체제로 구성된 것은 조선이라는 국가의 중앙과 지방의 정치구조와 행정조직이 모두 6조 체제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사회는 중앙의 6조를 비롯하여 지방의 수령 산하에도 이방, 호방, 예방, 병방, 형방, 공방 등 6방을 두었는데, 법전 또한 이러한 행정 조직의 체계에 맞춰 규정함으로써 정치와 행정의 효율성을 꾀하였다.

‘경국대전’에서 몇 가지 흥미로운 조항들을 살펴보자. ‘형전’의 공노비에 관한 부분 중에는 노비의 출산 휴가에 관한 규정이 있다. 즉 부녀자가 임신한 경우 출산 전 30일, 출산 후 50일 등 총 80일의 휴가를 주고 그 남편에게도 산후 15일의 휴가를 준다는 규정이 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도 여성의 육아 휴직에 대해 많은 조처들이 시행되고 있는데, 조선시대 헌법에 이미 노비에게까지 휴가를 명문화한 점은 놀랍다.

‘예전’의 과거제도에 관한 규정 중에서는 과거응시가 원천적으로 금지된 사람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 중에는 장리(贓吏:뇌물을 받은 관리)의 자손들이 포함된 것이 주목된다. 부정부패를 한 사람은 그 후손들조차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부정부패에 엄격하게 대처한 의지가 엿보인다. 과거응시의 초시 합격자의 경우 인구비례로 지역별 합격자수를 배정한 지역별 쿼터제도는 지역차별 문제가 큰 이슈가 되고 있는 현재에도 상당히 음미할 만하다.
◇육전상정소를 설치하는 등 경국대전 편찬작업을 본격적으로 주도한 세조가 묻혀 있는 광릉.

‘호전’에는 세무비리 공무원에 대한 재산 몰수 규정도 있다. 즉 백성들이 세금으로 내는 쌀이나 곡식 등을 받아 중간에 가로챈 자는 비록 본인이 죽어도 그의 아내와 자식에게 재산이 있으면 강제로 받아낼 수 있게 했다.

이외에도 ‘경국대전’에는 정해진 복식을 어길 경우 그에 해당하는 형벌을 규정하고 있는데, 특히 금과 은 같은 사치스러운 물품을 사용하거나 당상관 이하의 자녀가 혼인할 때 사라능단 같은 수입 비단을 사용하면 장(杖) 80대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형전’에는 ‘분경금지법’이 주목된다. ‘분경’이란 ‘분추경리(奔趨競利)’의 준말로 분주히 쫓아다니며 이익을 다툰다는 말로서 ‘형전’의 금제(禁制) 조항에는 ‘분경하는 자는 장 100, 유배 3000리에 처한다’고 규정하여 권세가문에 드나들면서 정치적 로비를 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하였다. 대통령의 측근을 비롯한 권력자 친인척들의 부정부패가 끊일 날이 없었던 현재 정치상황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건국대 사학과 교수 shinby7@konk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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