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 속의 한류를 찾아서]日 국보로 지정된 석가삼존상백제 장인의 손길로 만들어져

관련이슈 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 속의 한류를 찾아서

입력 : 2006-11-29 16:55:00 수정 : 2006-11-29 16:55:00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16>위덕왕 후광 받은 백제인 사마달등 가문 나라 땅 호류지 사찰은 성덕태자(쇼토쿠태자·574∼622)가 아버지 요메이왕(585∼587 재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서기 607년에 건립했다. 그 무렵 백제 제27대 위덕왕(554∼598 재위)이 왜왕실로 보내준 백제 건축가들이 빼어난 건축 솜씨로 호류지 본체인 금당과 오중탑을 세웠다. 호류지에는 6∼7세기 초 백제 위덕왕이 왜왕실로 보내준 녹나무 ‘백제관음상’(허공장보살상)과 ‘구세관음상’이 1400년이란 세월을 지켜오며 백제 불교 미술의 눈부신 예술혼을 오늘까지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발자취를 간략하게 살펴보더라도 백제 위덕왕이 왜나라로 건너가 몸소 나라를 다스렸던 아버지 성왕(왜나라 긴메이왕을 겸임)의 왜나라에 대한 불교 전파와 그 중흥에 얼마나 많이 이바지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백제 성왕이 백제와 동시에 왜나라를 함께 다스린 내용은 추후에 다룰 예정이다.
이와 같이 백제 왕실과 떼어놓을 수 없는 명찰이 나라땅 이카루가의 호류지 가람이다. 이곳에서 또 다른 일본 국보 불상으로 각광받는 유명한 불상은 ‘석가삼존상’(釋迦三尊像)이다. 고구려 담징 스님의 ‘금당벽화’로 이름난 호류지 금당 안에 봉안되어 있는 본존 불상으로, 3체의 불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몸체가 큰 한가운데 불상이 석가여래상이고, 좌우에 각기 서있는 것은 보현보살과 문수보살 불상이다. 서기 622년에 작고한 성덕태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백제인 불공 사마지리(司馬止利·7C)가 만든 금동불상이다. 사마지리가 손수 제작했다는 기록은 석가삼존상의 광배명에 써있고, ‘성덕태자전력’에도 나와 있다.
호류지 사찰의 한글판 안내 팸플릿엔 이렇게 쓰여 있다. “호류지 본존에 안치되어 있는 성스러운 불당이 금당입니다. 위풍당당한 이 건물 속에는 쇼토쿠태자를 위해 건조된 금동 석가삼존상(아스카시대)이 봉안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내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아스카시대에 백제 위덕왕이 보내준 2체의 녹나무 불상에 대해선 왜곡해 적고 있다(2006년 11월15일 필자 현지 방문44 확인).



◇고겐지 터전


이를테면 호류지 고문서에서 백제왕실(위덕왕 시대)이 왜왕실로 보내준 사실을 명확히 밝히고 있는 녹나무 ‘백제관음상’에 대해서 사실을 숨기는 해설을 하고 있다. “호류지에 전해 내려오는 구다라관음상(아스카시대)은 일본 불교 미술을 대표하는 불상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라고만 내세울 뿐이다.
백제관음에 관한 호류지 고문서에는 “이 녹나무 불상은 당초에 ‘허공장보살’이라는 명칭으로 백제국에서 보내주었다”(‘제당불체수량기 금당지내’)고 적고 있다. 그러나 백제에서 보내온 것이 아니고 일본에서 만든 대표 불상으로 왜곡되고 있는 것이다.
구세관음에 대해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관음보살의 화신(化身)이라고 믿고 있는 쇼토쿠태자 실물 크기의 비불(秘佛) ‘구세관음상’(아스카시대)을 안치하고 있다”는 엉뚱한 설명이 실려 있다. 사실은 성덕태자가 아니고 백제 성왕의 화신이다. 구세관음상은 본래 성왕의 모습으로 백제왕실에서 만들어 왜왕실로 보내준 불상이다. 그 발자취는 이곳 호류지 학승 센항(千範)이 1768년에 필사한 호류지 사찰의 고문서(‘성예초’ 14C경)에도 기록돼 있다. “백제 위덕왕이 서거하신 부왕 성왕을 추모하여 백제왕실에서 만들어 보내준 것이 구세관음상이다. 쇼토쿠태자는 백제 성왕의 화신이다”는 장문의 기사가 지금도 호류지에 전해오고 있으니 안내 팸플릿은 본말을 뒤바꾸고 있는 것이다. 이런 왜곡은 마땅히 시정되어야 한다.
백제 위덕왕의 후광을 받은 나라 아스카땅에 살던 백제인 사마달등(司馬達等·시바노 다치토·6∼7C) 촌장(村主·스구리)은 아스카시대의 영웅 소아마자 대신과 정분이 두터운 구다라인 지도자로서 구다라 불교 중흥에 다각적으로 기여해 왔던 아스카 불교의 기념비적인 인물이다. 그의 큰 발자취는 소아마자 대신이 백제왕실에서 보내준 미륵보살 석상을 백제인들의 큰 터전 이시카와 구다라촌(石川百濟村)의 자기 저택으로 모셔다 불당을 세우고 받들기 시작했을 때부터 드러났다. 이때 사마달등 촌장은 불당에서 봉직할 주지 스님을 찾아나섰다. 그는 결국 고구려에서 건너와 하리마땅에서 살던 혜편(惠便) 스님을 찾아내어 소아대신의 불당으로 모셔 왔다. 사마달등은 또한 소아마자 대신의 불당을 위해 서기 584년, 11세 소녀인 자기 친딸 시마(嶋)를 여승 수도생으로 출가시켰다. 그 소녀의 법명은 선신니(善信尼)다(일본서기).



◇석가삼존상(왼쪽), 대위덕명왕상’의 그림상(현재 미국 보스턴박물관 소장 중) - 위덕왕으로 포스터 붙어 있는 사진.


서기 588년에 백제 위덕왕은 혜총(惠總) 스님 등 10명 가까운 백제 승려들과 사찰건축가 태량미태(太良未太)를 비롯하여 문가고자(文賈古子), 기와박사 마나문노(麻奈文奴) 등등 수많은 기술진을 아스카의 왕실로 파견해 주었다(일본서기). 아스카의 구다라인 왕실에 대한 백제 위덕왕의 지원이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아스카시대로부터 500년이 지난 헤이안시대(794∼1192)까지도 위덕왕을 신격화시켜 ‘대위덕명왕’으로 추앙하며 목조 좌상이며 탱화(불화)를 그려 왕실에 모신 것을 우리는 기억해둘 만하다. 백제로부터 건너온 건축가들에 의해 비로소 아스카에는 왜국 최초의 칠당가람이 서게 되었고(서기 596년), 이어 호류지 대가람도 완성되었다(서기 607년).
이 당시 소아마자 대신은 위덕왕의 윤허를 받고 사마달등의 14세 딸 선신니 등 모두 3명의 여승 수도생을 모국 백제로 보낼 수 있었다. 선신니 일행은 백제 사신을 따라서 선진국인 모국땅을 처음 밟는 감격을 누리게 되었다. 이들은 위덕왕의 따사로운 보살핌 아래 모국 백제에서 2년간 유학하고 득도한 후 서기 590년 3월 학문승 신분으로 아스카의 고향땅으로 금의환향, 왜나라 최초의 여승이 되었다. 아스카땅 백제인 터전인 무쿠하라의 고겐지(向原寺)에 입주했다.
고겐지는 당초 소아마자의 부친 소아도목(생년 미상∼570) 대신이 자택에 왜나라 최초로 세웠던 소규모의 절이다. 사마달등의 아들 사마다수나(司馬多須奈)도 승려의 길에 들어섰다. 서기 587년 4월2일, 요메이왕이 병석에서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짐은 삼보(三寶, 佛·法·僧)에 귀의하려고 한다”고 최초로 불자임을 선언한다(부상략기). 이때 백제인 불공(佛工)인 사마다수나는 병상의 요메이왕 쾌유를 부처님에게 기원하기 위해 머리를 깎고 출가해서 사카다지(坂田寺)라는 사찰을 세우면서 장육불상(丈六佛像)를 만들기 시작했다(中井眞孝 ‘佛敎の受容.公傳と私傳.司馬氏三代’, 1981). 그 보람도 없이 요메이왕은 4월5일에 붕어했다. 향년 41세였다(‘神皇正統記’1343).

이제 이야기를 호류지 금당으로 다시 거슬러 올라가 보자. 호류지의 본존 국보 불상인 ‘석가삼존상’은 누가 만든 것인가. 모두에 언급했듯이 사마달등 촌장의 친손자인 사마지리의 뛰어난 솜씨다. 그는 주로 지리불사(止利佛師·도리붓시)나 속칭 ‘도리붓시’(鳥佛師)로 불렸다. ‘새불사’라는 뜻도 되겠으나, 일본의 ‘만요가나’라고 하는 우리나라 이두식의 한자어 음차에 의해서 ‘지리’(止利)를 ‘도리’라고 읽는 데서 생겨난 표현이다. 지리불사의 첫 작품은 현재 안거원(아스카 절터)에 모셔 있는 철불 석가여래상이다. 사마지리 최초의 불상은 1956년부터 시작되었던 아스카 절터 발굴 현장에서 나온 것이다. 발굴에 참여했던 요코야마 고이치(橫山浩一) 교수는 “지리불사가 만든 것으로 전해지는 본존인 석가여래상은 손상이 심하지만, 역시 옛날의 대좌 위에 안치된 채로 고스란히 발굴했다”(‘아스카발굴사’, 1974)고 확인했다. 일찍이 도쿄대학 구로카와 마요리(1829∼1906) 교수는 “사마달등의 손자가 만든 불상은 한국 양식”(‘工藝志料’, 1905)이라고 단정한 바 있다.
사마달등과 소아마자의 밀착된 구다라 불교 중흥 사업의 과정에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서기 585년 2월이었다. 소아마자 대신은 오노노오카(大野丘) 언덕 북쪽에다 불탑을 세우게 됐다.(元興寺伽藍綠起竝 流記資材帳) 이 오노노오카의 불탑은 백제의 왜나라 불교 포교 이래 최초의 불탑이었다.
산 언덕에 탑이 우뚝 서니, 나라의 아스카 일대에서 모든 이의 시선을 끌게 됐다. 소아마자 대신은 불탑을 기공하면서 공양을 올렸다. 그런데 37일 뒤에 부처님에게 올리는 재식(齊食) 위에 사리가 나타난 것을 발견했다(앞 문헌). “그 사리의 출처는 사마달등이 본래 가지고 있었던 것”(林屋辰三郞 ‘日本の古代の文化’ 岩波書店, 1971)이라고 하야시야 다쓰사부로 교수는 논술한 바 있다. “사마달등이 소유하던 자신의 부처님 사리를 소아마자 대신에게 바쳤다.
소아마자는 시험 삼아 쇠망치로 사리를 쳤으나 깨지지 않았고, 물속에 넣으면 사리는 신기하게도 뜻하는 대로 물에 뜨기도 하고 가라앉기도 해서 드디어 소아마자 대신 등은 불교를 깊게 믿게 되었다”(앞책). 사리는 매우 컸고 홍백색인데, 보라빛 광채가 사방에 번쩍였다. 소아마자 대신은 사리를 유리 단지에 모셔넣어 두고 저녁마다 절을 올렸는데, 매일 저녁 빛이 나타났다(일본서기). 이윽고 오노노오카 언덕 위에 탑신(塔身)을 세우는 대회를 개설하고 사리를 탑신 밑에 봉안하게 됐다. 사마달등이 부처님 사리를 개인적으로 지니고 모실 수 있었던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백제 위덕왕으로부터 사신을 통해 받았던 것. 그러기에 사마달등의 왜나라에서의 불교 포교 사명이 얼마나 컸던 것인지 짐작케 해준다.
(다음주에 계속)
한국외대 교수 senshyu@yahoo.co.kr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김혜윤 '사랑스러운 볼하트'
  • 김혜윤 '사랑스러운 볼하트'
  • 채수빈 '매력적인 미소'
  • 조보아 '아름다운 미소'
  • 아이브 장원영 '빛나는 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