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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 속의 한류를 찾아서]백제출신 ''소아''가문 日조정 실력자 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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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11-15 11:49:00 수정 : 2006-11-15 11: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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⑮위덕왕과 구다라서 건너간 소아씨 가문 백제계 4명의 일본 왕을 옹립했던 아스카의 백제인 영웅 소아마자(蘇我馬子·소가노 우마코, 출생년 미상∼626)를 모르고는 일본 고대 역사를 논할 수 없다. 일본 최초의 웅장한 칠당가람 아스카노데라가 바로 그의 작품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욱 주목할 인물은 칠당가람 건축을 밀어준 백제 제27대 위덕왕(威德王·554∼598 재위)이다. 위덕왕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아스카 구다라왕실의 불교국가 건설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백제 제26대 성왕의 장남인 위덕왕은 수많은 학승과 여승, 사찰 건축가들을 대거 일본 왕실로 보내 주면서 아스카 정권에 정신적인 기둥이 됐다. 심지어 도쿄미술학교 창립자 오카쿠라 가쿠조(岡倉覺三·1862∼1913) 교장이 “일본 왕실에서는 위덕왕 사후에 ‘화엄신장’(華嚴神將)으로 드높이 섬기며 ‘대위덕명왕’(大威德明王)이라고 찬양했다”고 적시했을 정도다.(‘岡倉天心全集’ 五 1940)
일본 헤이안시대(794∼1192)에 백제 위덕왕을 ‘대위덕명왕’으로 신격화시킨 발자취는 오늘날 한국, 일본이 아닌 미국 보스턴미술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이 지면을 통해 처음 공개하는 사실이다. 보스턴미술관 일본전시실에 11세기 일본왕실에서 만든 높이 93㎝짜리 위덕왕 목조 좌상 ‘대위덕명왕좌상’이 전시되고 있다.
‘대위덕명왕’에서 ‘명왕’이란 불교의 신격(神格)으로 온갖 죄를 뉘우치도록 이끌어주는 ‘지혜의 왕’이다. ‘명왕’에게는 죄악을 물리쳐주는 위력 넘치는 세 개의 얼굴(忿怒相)이 있다. 보스턴미술관에는 또 다른 비단 그림 ‘대위덕명왕좌상’(11세기 제작)도 있다. 아스카시대부터 헤이안시대까지, 일본 왕실이 위덕왕을 받든 물증이 아닐 수 없다.



◇도유라궁 터전의 건물(사진 왼쪽), 아스카역(긴데쓰 전철).


이제 ‘구다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소아마자 대신 가문의 발자취를 자세하게 살펴보자. 고구려 장수왕(413∼491 재위)이 한강변의 백제 왕도 한성을 포위하고 백제 개로왕(455∼475 재위)을 죽인 사실은 ‘삼국사기’를 통해 후세에 전해진다. 개로왕은 고구려 첩자로 왕실에 침투한 승려 도림과 바둑을 두면서 국사를 등한시했다. 도림은 백제 국가 기밀을 모두 탐지하자 고구려로 도망쳤고 개로왕은 도탄에 빠진 백성과 함께 장수왕의 침공으로 파국에 이르렀다.
이때 왕은 문주 왕자를 남쪽으로 피신시켰다. 간신히 화를 면한 왕자가 개로왕을 이어 문주왕(475∼478 재위)으로 등극하고 왕도를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천도했다(삼국사기). 바로 이 시기에 문주왕을 도왔던 목리만치(소아만치) 대신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백제가 후국(候國)이던 일본과 손잡고 고구려에 대항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가도와키 데이지(門脇禎二) 교토부립대 사학과 교수는 “한국에서 건너가자마자 유랴쿠왕(雄略王 456∼479 재위)의 조정에서 대신으로 뛰어난 정치 수완을 발휘하게 된 목리만치가 새로운 성씨를 만든 것이 소아(蘇我 소가)씨였다. 목리만치의 새로운 성명은 소아만치(蘇我滿智 소가노마치)였다. 유랴쿠왕으로서는 고구려·백제 정세에 소상한 목리만치가 큰 도움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요직에 등용했다”(飛鳥 1995)고 했다.


◇일본 최초의 1탑3금당 양식의 웅장한 아스카노데라(596년 준공) 복원 모형(나라문화재연구소).


유랴쿠왕은 누구인가. 소아 가문을 일본 왕실에 자리잡게 해 준 유랴쿠왕은 백제를 건국한 시조 온조왕(기원전 18∼기원후 27)의 제사를 몸소 받든 일본왕이다. 저명한 사학자이자 일본어학자였던 가나자와 쇼사부로(金澤庄三郞 1872∼1967) 전 고쿠가쿠인대 교수는 “유랴쿠 천황은 백제 건국신(建國神)에게 제사드렸다”고 일찍이 자신의 저서 ‘일선동조론’(1929)에서 밝히고 있다. 여기서 아울러 지적해두자면 목리만치는 뒷날 아스카 왕실의 대신이 된 소아마자의 친고조부다.
목리만치가 일본에 터전을 잡은 곳은 ‘소가(曾我)’라는 백제인 호족들이 지배하던 고장이었다. 이 고장을 석천(石川 이시카와)이라고도 부른다. 현재 그 터전에는 일본 불교 진흥의 유적으로 이름난 ‘석천정사’(石川精舍)라는 불당(佛堂) 터가 자리 잡고 있다. 소아마자 대신이 584년 자기 저택 자리에 불당을 세운 터전이다.
목리만치가 성씨를 소아씨로 바꾼 발자취도 흥미롭다. 가도와키 데이지 교수는 다음과 같이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5세기 말 목리만치의 식솔들이 삶의 새 터전으로 잡은 장소는 어느 곳이었던가. 그 고장은 나라의 ‘소가’ 터전이었다. 목리만치와 그 일족은 우네비산(현재의 나라현 가시하라시에 있는 산)의 북쪽 ‘소가’ 땅에 정착했다. 지금의 가시하라시 이마이초(今井町)이다.”
이 지역은 고대에 줄곧 ‘구다라강’(百濟川)의 강 이름으로 일본 역사에 알려지고 있는 오늘의 소가강(曾我川) 중류 지대에 속하는 고장이다. 이 일대는 그 옛날 나라시대(710∼784)의 왕궁, 고분 등의 유적이 산재한 명소이다. 목리만치 대신에 앞서 ‘소가’ 땅의 지배자였던 백제인들은 일찌감치 강이름조차 ‘백제강’인 ‘구다라강’으로 명명했었다.


◇대위덕명왕좌상(미국 보스턴박물관 소장).


소아마자의 직계 조상인 소아만치 가문은 한국에서 건너가 대대로 조정의 강력한 지배자가 되었다. 소아만치의 친아들은 이름이 소아한자(蘇我韓子 가라코)이고 그의 손자는 소아고려(蘇我高麗 고마), 증손자는 소아도목(蘇我稻目 이나메)이며, 고손자는 소아마자(蘇我馬子 우마코)이다. 친아들 이름의 ‘한자’(韓子)는 한국인 자식이라는 뜻이고 손자 ‘고려’(高麗)는 고구려이며 ‘도목’(稻目)은 벼농사가 한반도에서 건너가 번성하게 되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소아마자라는 이름은 백제 왕실이 암수 한 쌍의 양마를 일본 왕실로 보내준 일을 상징한다고 본다.
소아씨 가문이 백제계 일본 왕실과 외척으로 철저하게 밀착된 것은 소아마자의 아버지 소아도목(출생년 미상∼570) 대신 때부터이다. 긴메이왕(미상∼571 재위, 백제에서 건너간 성왕)의 부인 소아견염원(蘇我堅鹽媛) 왕비는 소아도목 대신의 큰딸이며, 둘째 왕비는 소아도목 대신의 둘째딸인 소아소자군(蘇我小姉君)이다. 소아씨 가문은 결국 외손자들 중에서 일왕 3인을 얻었다. 실로 막강한 외척 지위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외척 정치의 씨앗은 당초 소아도목(목리만치)이 뿌리기 시작했으나 가장 맛난 과실을 마음껏 누린 것은 소아마자 대신이었다.
“소아씨 가문의 여자들이 낳은 왕족은, 소아씨의 혈통을 잇는 왕족이라는 뜻에서 소아계(蘇我系) 왕족으로 불린다.”(遠山美都男 ‘謎にみちた古代史上 最大の雄族’ 1987). 여기에 덧붙이자면 “백제 성왕은 왜의 긴메이왕이다”(‘袋草子’ 1158)라는 내용이 담긴 고대 문헌도 있다. 지난날 필자가 발굴한 사료다.
목리만치가 새 성으로 선택한 ‘소가(蘇我 소아)’의 ‘소(蘇)’와 새 정착지의 지명 ‘소가’(曾我)의 ‘소’(曾)는 글자 형태가 서로 다르다. 그러나 고대 일본에선 한자어의 음차(音借)에 의해 똑같은 소리를 내는 글자를 우리 ‘이두’식으로 함께 썼다. 그런 한자어 표현법을 ‘만요가나’라 부른다. 소아씨 가문의 옛 사당이 지금도 가시하라시의 이마이초에 고스란히 이어져 오고 있다. 이 사당의 명칭은 ‘소가니마스소가쓰히코신사(宗我坐宗我都比古神社)’이다. 여기서도 사당의 ‘소가’(宗我)는 음차에 의한 한자 사용이며, 이 역시 蘇我나 曾我와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한국외대 교수 senshyu@yahoo.co.kr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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