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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 속의 한류를 찾아서]아스카 왕실 장악 백제 불교문화 꽃피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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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11-08 11:59:00 수정 : 2006-11-08 11: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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⑭구라다인(백제인)영웅 ''소가노 우마코''시대 일본 아스카문화 시대(592∼645), 즉 불교문화시대의 구다라 사람(백제인)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소아마자·출생년 미상∼626) 대신. 그는 당시 불교전쟁(587년)을 대승리로 이끌면서 아스카의 구다라왕실 실권을 한손에 거머쥐게 됐다. 그의 말 한마디에 하늘을 날던 새도 떨어질 만큼 위세가 당당했다.
교토부립대학 사학과 가도와키 데이지(門脇禎二) 교수는 필자에게 보내준 저서(古代を考える飛鳥·1995)에서 “5세기에 도래한 백제의 고급 관료 목만치(木滿致·백제 제21대 개로왕의 조신으로 제22대 문주왕을 등극시킨 대신)와 그의 일족이 야마토의 소가 터전에 정착한 것이 소아씨 가문의 기원”이라고 밝혔다. 일찍이 와세다대학 사학과 미즈노 유(水野祐) 교수도 “소아 가문은 조선인이다”(천황가의 비밀·1977)고 단정했다. 그 밖의 학자들도 “소아씨 가문은 백제 도래인이다”고 입을 모은다. 물론 부정적인 주장도 없지 않다.
나라땅 아스카역(긴테쓰 전철)에서 내려 자전거를 타고 드넓은 ‘아스카공원’ 서북쪽으로 30분 남짓 달려 올라가면 언덕 드높은 곳으로 아스카 터전의 상징적인 거대한 바윗돌 고분과 마주치게 된다. 이름하여 ‘이시부타이’(石舞臺·석무대)라는 거석 바윗돌로 축조된 일본 제일의 바위 무덤이다. 이 석무대 고분에 매장되었던 주인공은 구다라인 소아마자 대신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무덤 바깥쪽의 한 변의 길이는 85m이고 관이 안장된 석실 내부 선도의 길이 11.5m. 한여름에 들어가도 한기를 느끼게 된다. 봉분을 덮었던 흙은 자취 없고, 거석으로 엮어진 옛날 큰 구조물만이 드러나 웅장한 광경을 이루고 있다.
필자는 석무대를 찾아갈 때마다 이 고분 언덕 위에 서서 멀리 아스카공원 터전을 굽어보며 장구한 한일관계 역사의 허실을 실감한다. 아득한 옛날인 약 2000년 전부터 큰 배를 만들어 타고 미개했던 선주민들의 왜땅으로 건너간 수많은 백제인, 신라인, 가야인, 고구려인들. 특히 구다라 사람들은 약 1500년 전부터 현해탄 거센 물살을 헤치며 본격적으로 왜섬의 규슈를 비롯하여 지금의 오사카땅인 ‘구다라스’를 정복했고, 그곳으로부터 다시 ‘구다라노’라는 황막한 들판을 계속 동진하여 ‘아스카’(飛鳥)라는 아늑한 분지에 새로운 왕도를 만들었다. 제30대 비타쓰왕(敏達王· 572∼585 재위)이 왕궁으로 지은 것이 구다라대정궁(百濟大井宮)이다(扶桑略記, 13C).
“비타쓰왕은 백제 왕족이다”(‘신찬성씨록’ 825년 일본 왕실 편찬 족보)라는 것이 드러났고, 그의 친손자인 제34대 조메이왕(舒明王, 629∼641 재위)은 “구다라강(百濟川·지금의 나라땅 소가강) 강변의 백성들에게 명하여 구다라궁(百濟宮)과 구다라대사(百濟大寺)를 짓고 구다라궁에서 살았다”(일본서기)고 한다. 이 고장 아스카 일대는 구다라인의 역사의 숨결이 짙게 밴 고장이기에 오늘에까지 백제인들의 발자취는 뚜렷하다.



◇‘아스카노데라’ 터전에 있는 소규모의 ‘아스카노데라’(飛鳥寺).


가령 소아마자 대신이라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았다고 역으로 가정한다면 우선 백제 불교는 이 고장에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했다고 단정해도 좋다. 왜냐하면 소아마자 대신을 희대의 영웅으로 만든 업적은 구다라 불교 신장사업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는 일본 초기 벼농사 등의 농업, 구다라인 대장간이 만든 칼과 농기구용 철공 작업, 왕실과 귀족 주택용 기와 제작 등이 기간산업을 이루었다. 그 배경에는 한반도 도래 종교 숭상이라는 강력한 통치 차원의 정신적 카테고리 구축이 있었다.
소아마자 대신과 병석의 제31대 요메이왕(用明王·585∼587 재위)의 왕자 쇼토쿠태자가 손잡고 종래의 국신파 모노노베노 모리야(物部守屋·출생년 미상∼587) 대련을 불교전쟁으로 제거시켰다. 병상의 요메이왕이 승하하자 대뜸 소아마자 대신은 요메이왕의 이복동생인 스슌왕(崇峻王·587∼592 재위)을 제 손으로 왕위에 올렸다. 그러고 나서 곧 착수한 작업은 아스카 땅에다 구다라 불교 성전으로서의 칠당가람을 짓는 일이었다.
서기 588년 초에 백제로부터 불교사원 건축가들이 대거 아스카 땅 구다라인 왕실로 건너왔다. 이 당시 백제의 제27대 위덕왕(威德王·554∼598 재위)은 적극적으로 아스카 왕실의 불교 진흥에 박차를 가하며 소아마자 대신을 힘껏 밀어주었다. 5세기 백제왕실에서 만들어 왜 왕실로 보내준 칠지도(七支刀·현재 나라현 덴리시 이소노카미신궁 봉안 중)에 “왜왕은 백제의 후왕(侯王)”이라는 명문에서 이런 시대적 흐름을 알 수 있다.
소아마자 대신은 자신의 힘으로 등극시킨 스슌왕의 외삼촌이다. 스슌왕의 생모인 오아네노키미(小姉君·소자군) 왕비가 소아마자의 작은누님이며, 571년 승하한 구다라인 긴메이왕(欽明王)의 왕후 6명 중의 한 분이었다. 서기 588년 3월 백제로부터 본격적으로 한국 불교가 왜나라로 상륙하게 되었다. ‘강고우지연기’(元興寺緣起)와 ‘태자전력’(太子傳曆)에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백제국의 사신이 스님 혜총(惠總) 영근(令斤) 혜욕(惠是)과 함께 건너왔고 부처님 사리도 보내 주었다. 또 그 후 백제국의 은솔(恩率) 벼슬의 수신(首信)과 덕솔(德率) 개문(蓋文) 나솔(那率) 복부미신(福富味身) 등 사신과 부처님 사리, 스님 영조율사(聆照律師) 영위(令威) 혜숙(惠宿) 도엄(道嚴) 영개(令開), 사찰 건축가 태량미태(太良未太) 문가고자(文賈古子), 노반박사인 장덕(將德)벼슬의 백매순(白昧淳), 기와박사(瓦博士)인 마나문노(麻奈文奴) 양귀문(陽貴文) 능귀문(陵貴文) 석마제미(昔麻帝彌), 화공(畵工)인 백가(白加)를 보냈다.”
이 사실은 ‘일본서기’도 똑같이 전하고 있다. 백제로부터 여러 사신과 고승, 사찰 건축관계 기사들이 계속 왜나라로 건너오게 된 것은 당시 백제 위덕왕이 부왕인 성왕(聖王·523∼554)의 후국 왜나라의 불교국가 건설계획을 실행한 덕분이다. 또 동시에 소가노 우마코 대신의 간절한 청원도 작용했다.



◇오늘날의 ‘아스카노데라’ 법당에 있는 7세기 철제 석가불상인 ‘아스카 대불’(왼쪽), 왜 왕실에서 입었다던 ‘백제옷’인 버선과 주름치마 곤룡포. 일제 때의 복식학자 세키네 마사야 교수가 손으로 그린 그림(1926년). 이 고대 한국 왕실 복식은 ‘정창원’(나라)에 있으나 공개된 적은 아직 없다.


소가노 우마코 대신이 사신과 스님 등 관계 인사들을 융숭하게 대접하면서 한국식의 큰 가람을 짓게 한 것이 ‘아스카노데라’이다.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아스카 백제인 귀족 가문의 선신니(善信尼) 등 3명의 불교 수도생을 모국 백제에 유학시키게 도와 달라고 백제 사신에게 요청했다. 이때 소가노 우마코 대신의 간청을 받은 백제 사신은 위덕왕의 윤허를 받아야 한다고 일단 거절했다. 나중에 위덕왕의 윤허를 받고 다시 건너온 사신 수신(首信) 등을 따라서 아스카의 세 비구니 수도승이 588년 모국 백제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일본서기)
태량미태 등 건축가들의 설계와 기초 공사가 완료되자 588년 7월부터 아스카노데라(飛鳥寺, 法興寺, 元興寺 등으로도 부름) 건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칠당가람은 장장 8년간의 대공사 끝에 596년 11월 준공되어 소가 대신의 아들인 젠토쿠(善德)가 주지로 임명되었다. 이곳에는 그 옛날의 아스카노데라 당시의 본존 불상인 ‘석가여래좌상’이 지금도 모셔져 있는 안교인(安居院·안거원)이 있다. 왜나라 최초의 한국 고대 대가람 터전이 본존불상과 함께 보존돼 오고 있는 것이다.
당시 나라 구다라왕실의 불공이던 사마지리(司馬止利·7세기)가 만든 ‘석가여래좌상’(일본서기)이 1956년부터 2년간의 사찰터 발굴로 출토되었다. 이 가람은 하나의 탑과 북, 동,서 3방향의 금당을 갖춘 대규모라는 것이 밝혀졌다. 더구나 “이 같은 1탑3금당 양식의 사찰은 일본에서는 이곳 말고는 찾아볼 수 없으며, 평양(북한) 교외의 청암리 고구려 절터와 그곳 근처인 상오리 절터에 닮은 형식의 폐사터가 있다”( 古代寺院の成立·1985)고 게이오의숙대학 사학과 시미스 마사지(志水正司) 교수 등이 지적했다. 아스카노데라의 위치는 현재의 나라현 다카이치군(高市郡) 아스카(明日香)이다. 아스카(明日香)와 아스카(飛鳥)는 똑같은 지명이다. 한자어만 다를 뿐 한국 이두식의 똑같은 표현으로 풀이된다.
이 아스카절 건축 공사가 시작된 지 5년째 되던 해의 일이다. “스이코 여왕 원년(593년) 1월, 아스카 땅에서 한창 건축 중이던 아스카노데라 찰주를 세우는 법요 때 만조백관이 모두 백제 옷을 입었고 구경하던 사람들이 기뻐했다”(부상략기·13세기)고 전해진다. 당시의 백제 옷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저명한 복식학자 세키네 마사나오(關根正直) 교수는 자신의 저서(服制の硏究·1925)에다 손수 정창원(正倉院·나라땅의 8세기 중엽부터의 일왕실 보물 창고, 비공개)의 한국 고대의 버선이며 주름치마, 곤룡포 등을 손수 그린 그림 등을 공개하였다. 스이코 여왕을 비롯해서 백제계 여왕들은 한국식과 조금도 다를 데가 없는 똑같은 모양의 비단 치마인 어상(御裳)과 양 어깨와 소매에 걸쳐 큰 용을 수놓은 곤룡포인 어대수(御大袖)를 입었었던 것을 추찰케 했다. 더욱 반가운 것은 한국 버선과 똑같은, 코끝이 오뚝한 금말(錦襪)이라고도 부르던 ‘비단 버선’(흰 비단에 보라색 무늬로 연꽃 수를 놓았다)을 신은 사실이다. 이로써 고대 일본 왕실의 복식이 한국 왕실과 동일한 양식의 것임을 알게 한다.
한국외대 교수 senshyu@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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