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세계는 지금]獨 끝없는 과거사 청산

입력 : 2005-05-09 14:00:00 수정 : 2005-05-09 14:00:00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유대인 학살 참회" 60년째 고개숙여 독일은 과거사 반성을 끊임없이 이어가고 있다. 1970년 12월 빌리 브란트 당시 독일 총리가 폴란드 바르샤바의 빈민촌 유대인 학살추념비 석상 위에서 무릎을 꿇고 나치의 잔학행위를 사죄한 것을 비롯해 10년 후에는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대통령이 나치의 죄악에 대해 독일 국민의 ‘집단책임’을 인정했다. 이후에도 헤어초크, 라우 대통령과 호르스트 쾰러 현 대통령과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에 이르기까지 기회 있을 때마다 정치인들은 과거 부끄러운 역사를 진솔하게 사과, 참회하고 있다.

독일은 일본과 달리 입으로만 과거를 사죄하고 있지 않다. 유대인 집단학살(홀로코스트)을 포함한 나치의 잔학행위에 대한 재정적 보상에 앞장서고, 그를 고발하는 각종 시설물들을 복원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Nie wieder!) 다짐하는 역사 교육을 꾸준히 실시하도록 지원, 독려하고 있다.
10일 오후 2시(현지시각) 독일 수도 베를린 중심 지역인 포츠담 광장과 ‘통일의 문’ 브란덴부르크 중간에 있는 1만9000㎢에 달하는 넓은 땅 위에 서는 회색 콘크리트 석재로 만든 석주(石柱) 2711개가 들어선 ‘유럽학살유대인추모비’공원의 문을 여는 제막식이 거행된다.
독일 국회(분데스탁)가 1999년에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유럽에서 나치에 의해 학살당한 600만명의 유대인들을 추모하는 종합기념비를 조성하기로 결의한 지 5년6개월 만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과거사 참회 추념공원이다.
총 공사비 2760만유로(약 356억원)를 들여 조성한 학살유대인추모비 공원은 종전 60주년을 맞으며 독일 정부와 국회가 그동안 보여온 나치의 대유대인 잔학행위에 대한 참회의 기념비적인 결정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일 연방정부와 16개 주정부는 1990년 동서독이 통일된 이후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을 추모하는 강제노동수용소 기념관 10개소와 기록문서보관소 12개, 박물관 5개와 관련 협회 10개를 독일 안에서 유지, 관리해 오고 있으며 이들 각종 기관을 역사 교육을 위한 교육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이번에 조성된 베를린의 유럽학살유대인추모비 공원은 지상의 석주광장 외에 지하에 거대한 유대인 추모센터를 설치, 2차대전 중 학살된 600만 유대인들에 대한 각종 자료와 기록들이 전시, 보관되고 기록영화가 상시 상영될 예정이다. 지난 3월 개관한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있는 홀로코스트 박물관인 야드 바셈과 제휴, 유럽 내 제2의 야드 바셈 역할을 하게 된다.
지상의 콘크리트 석주 공원은 가장 큰 석주의 높이가 4.7m, 폭은 0.95m에서 2.28m로 각각 크기와 길이가 다르게 구성됐으며 어른 1명이 지나갈 수 있는 폭으로 병렬돼 있다. 입구는 사면 팔방에서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고 지하 전시장은 서쪽에 입구가 마련돼 있다.
공원 설계자인 미국 뉴욕 출신의 페터 아이젠만은 석주 2711개는 특별한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추모공원의 설립을 1988년에 처음 제안한 사람은 독일 출신 여류 언론인 레아 로쉬와 사학자인 에버하르트 예켈이었다. 찬반의 긴 논의가 10년간 이어졌다.
그러나 유럽학살유대인추모비 공원 제안은 볼프강 티어제 국회의장의 동의를 얻어 1999년 6월25일 국회에서 설립 결의안이 통과되고 티어제 의장을 비롯한 독일 각계각층의 저명인사들로 구성된 재단이 설립되면서 본격화됐다.
시는 베를린에서 가장 노른자위 땅인 부지를 제공하는 데 동의했지만 통일 독일의 수도가 베를린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시공이 지연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베를린=남정호 특파원
johnnam@segye.com

인간도살장서 역사교육장으로
부켄발트 前강제노동수용소


◇독일 부켄발트 강제노동수용소 정문 위 시계는 미군이 수용소를 해방시킨 1945년 4월11일 오후 3시15분에 고정돼 있다. 수용소를 방문한 독일의 젊은이들이 정문 앞에 모여 수용소 시설을 둘러본 소감을 나누고 있다.
부켄발트=남정호 특파원
독일 중부 튀링겐주에 있는 부켄발트(Buchenwald) 전 강제노동수용소는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자행했던 유대인 집단학살(홀로코스트)을 상기시켜 주는 대표적 역사교육 현장으로 이름이 나 있어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독일이 낳은 대문호 괴테와 쉴러가 활약했던 문화도시 바이마르(Weimar) 북쪽 8km 지점에 있는 부켄발트 강제노동수용소는 1937년 7월에 건립돼 1945년 4월 미군에 의해 나치병사들의 손아귀에서 해방될 때까지 연인원 25만명의 유대인과 집시, 정치범들이 수용돼 그 중 5만6000명이 목숨을 잃었던 ‘인간 도살장’으로 악명이 높다.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강제노동수용소와 함께 잔인한 홀로코스트의 대표적 현장이었던 부켄발트 수용소 기념관 관장인 폴커하르트 크니게 박사는 “부켄발트 기념관은 특히 자라나는 독일 젊은이들에게 가장 부끄러운 독일의 역사를 보여주며 교훈을 얻고 있는 교육장”이라며 “역사는 감추어서는 안 되며 있는 그대로를 기록하고 보여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 길만이 부끄러운 과거사를 참회하는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최근 실시된 한 여론조사에서 독일의 10대 청소년 중 상당수가 홀로코스트를 알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나 교육정책을 책임지고 있는 주 정부들은 각급 학교와 연계, 역사교육을 강화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부켄발트 강제노동수용소는 해방되던 1945년 초에는 총 11만명의 유대인과 포로들이 86개 막사에 수용돼 있었으며, 이들을 감시하기 위해 6300명의 나치 돌격대(SS) 대원들과 530명의 여자 경비원들이 밤낮으로 포로들을 괴롭혔다. 포로는 대부분 유대인이었지만 집시, 동성애자, 정치범, 일반죄수, 정신장애인들도 상당수 포함돼 있었다.
SS대원들은 경비견을 풀어 포로들을 물어뜯게 하거나 몰아붙였으며, 구타와 고문, 집단 총살을 끊임없이 계속했다.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자가 매일 발생, 자고 나면 수용소 안에는 어디서나 시체들을 볼 수 있었다고 지난 4월11일 바이마르에서 거행된 수용소 해방 6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했던 생존자들이 증언했다.
부켄발트 수용소는 현재 시체 소각장, 지하 처형장, 독감방, 철조망과 감시탑, 집단묘지 등 과거 시설들을 일부 복원, 방문객들에게 60년 전에 발생했던 나치의 잔학상을 보여주고 있다.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문을 열고 있으며 입장료는 받지 않고 있다.
입장료를 받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방문객 수를 계산할 수는 없지만 매주 2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수용소를 찾고 있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수용소 관리소는 특별히 ‘젊은이들을 위한 대화의 방’을 마련, 학생들에게 역사 토론을 장려하고 있다.
동부 독일의 드레스덴에서 온 학생 세실리아 슈미트(17)양은 “수용소 전시물과 기록영화를 보고 난 후 우리 선조인 나치가 얼마나 잔혹했던가를 알게 됐다”고 털어놓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부켄발트=남정호 특파원
johnnam@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아이브 장원영 '빛나는 미모'
  • 아이브 장원영 '빛나는 미모'
  • 트리플에스 지우 '매력적인 눈빛'
  • (여자)이이들 미연 '순백의 여신'
  • 전소니 '따뜻한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