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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준의 7080사람들] '한국의 레이찰스' 이용복

입력 : 2013-02-15 14:18:20 수정 : 2013-02-15 14: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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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처럼 커지고 싶던 그 마음 내 마음/ 아름다운 시절은 꽃잎처럼 흩어져/ 다시 올 수 없지만
잊을 수는 없어라……’ 

‘한국의 레이찰스’라고 불리는 가수 이용복의 ‘어린 시절’, 남녀노소 누구나 한번쯤은 불러본 기억이 있을 법한 노래다. 8살 때 사고로 시력을 잃었지만 누구보다 긍정적으로 생활했던 그. 10살 때 진로 걱정에 기타를 배우면 굶어죽지는 않겠다고 생각해 음악을 시작했다고 한다. 

1970년 고등학교 2학년 때 ‘검은 안경’으로 데뷔해 1971년 KBS, MBC, TBC 3사의 신인가수상을 석권하고 1972년, 1973년 연속으로 MBC 10대 가수상을 수상하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1985년부터 2000년까지 녹음실을 운영하며 수많은 히트곡들을 만들어 내는 데 일조했다. 이용복은 인기를 끌었던 시절도 기억에 남지만 스튜디오를 운영했던 그 시절도 참 재밌었다고 회상했다. 

요즘엔 인천 연수동에서 ‘이용복의 줄리아’라는 라이브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강상준의 7080사람들이 그를 찾아 인천 연수동으로 향했다. 부인과 함께 인터뷰에 응한 가수 이용복은 외모에서 행복과 여유가 묻어났다.

-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인천 연수동에서 ‘이용복의 줄리아’라는 라이브 카페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새로운 손님이 오시니까 아주 즐겁게 생활하고 있어요. 새로운 인생 이야기도 하고 노래도 하고 눈코 뜰 새가 없습니다.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고요. 뜻하지 않은 일들이 벌어질 때도 있어서 때로는 실망하기도 하지만 ‘이렇게 살아가는 게 인생이구나’라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 고등학생 때 데뷔한 걸로 알고 있는데.

"네.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70년 가을에 데뷔했습니다. 가요계에 데뷔를 하게 된 동기가 재미있습니다. 서울 광교에 그룹 ‘데블스’가 출연하는 ‘태평양 다방’이라는 음악다방이 있었어요. 당시 전 고등학생이어서 다방출입이 금지됐던 시절이었는데 친구들이 자꾸 놀러가자고 해서 갔었죠. 당시 교복을 입으면 안 되니까 아버지 바지를 빌려 입고 갔었어요.(웃음) 그 음악다방에 손님들도 노래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어요. 준비 없이 가서 기타를 빌려서 노래를 했죠. "

"당시 프라우드 메리가 유행이었어요. 전주 박자가 조금 까다로워서 당시 박자를 제대로 맞추는 밴드가 없었어요. 제가 소화하니까 앙코르가 나오더라고요. 이튿날 친구들이 다방에 가자고 또 찾아와 다방에 갔죠. 비틀즈의 ‘Let it be’라는 곡이 처음 나왔던 시절이었는데 제가 그 노래를 부르려고 밴드에게 반주를 부탁했더니 노래를 모르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8비트로 쳐달라고 했죠. 노래를 하니까 기타리스트가 저한테 ‘작은 고추가 매운데’라고 하시더라고요. (웃음) 손님 중에 작곡가 한 분이 와 계셔서 제 노래를 듣고 나름대로 감명을 받아서 가요계에 데뷔하게 됐습니다. "

"그 작곡가에게 받은 곡이 데뷔곡 ‘검은 안경’입니다. 사실은 외국 곡을 개사해서 많이 불렀어요.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원곡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그런지 ‘검은 안경’을 대표곡이라고 많이 하더라고요. 대표곡까지는 아니거든요."

- 기타는 언제 처음 배우셨나요.

"초등학교 3학년 때 앞으로의 진로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하기 시작했어요. 아시다시피 제가 앞이 안보이니까 막막하더라고요. 술집에서 기타를 치면 돈을 많이 준다는 얘기와 전쟁이 나도 기타 치는 사람들은 굶지는 않겠다고 생각해서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죠. 군 위문 공연을 가도 먹고는 살겠다 싶어서 부모님께 기타를 사달라고 말씀드렸어요."
 
"부모님께서는 초등학생이 기타를 사달라고 하니까 중요하게 듣지 않으시더라고요. 기타가 6줄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여서 할 수 없이 고무 밴드를 상자에 걸쳐서 튕겼더니 소리가 제법 예뻤어요. 제 맘대로 줄을 맞춰서 튕기는 것을 부모님이 보시고 소질이 있다고 생각하셨는지 기타를 하나 사주시더라고요. 초등학교 4학년말에 기타를 쳤다고 봐야죠.
초등학생 때였는데도 기타를 이론적으로 생각하면 어려울 것이 없더라고요. 책을 보지 않고 연습을 했죠. 음악을 들으면서 따라서 2년 정도 하다 보니 손에 익더라고요. 학교 소풍가서 주로 반주를 담당했습니다."

- 1971년도 신인가수상을 수상하셨죠.

"신진레코드에 1년 6개월 정도 전속가수로 있었어요. 당시엔 신인가수로서 파격적인 대우였죠. 1971년 6월 이탈리아 산네모 가요제에서 입상을 했던 1~3위곡을 수입해서 번안가요로 불렀는데 3곡 모두 히트했어요. ‘마음은 집시’, ‘케세라’,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나요’라는 곡이었죠. 그해 7월에 당시 극장쇼단장협회의 제일 유명한 단장이 주최한 플레이보이컵 쟁탈전이라는 가요제가 있었어요. 전국 방송국 음악PD와 유명기자들이 심사위원이었는데 제가 포크부문 대상을 받았지요. 1971년에 TBC, MBC, KBS 3사의 신인가수상을 받았습니다."

- 당시 상황을 설명해주시죠.

"1972년에는 ‘달맞이꽃’, ‘그 얼굴 햇살’, ‘친구’라는 노래로 MBC 10대 가수상을 수상했습니다. 그 때 시민회관에서 시상식이 개최됐는데 화재가 났던 것이 기억나네요.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나왔어요. 1973년에 ‘사랑의 모닥불’, ‘마지막 편지’, ‘잊으라면 잊겠어요’라는 곡이 사랑을 받으면서 1973년에 10대 가수상을 또 수상하게 됐습니다. 1974년도에는 ‘진달래꽃’이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 영화도 찍으셨죠.

"1971년에는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나요’가 영화화 됐어요. 이 영화는 저의 이야기였는데 남진 선배가 대역을 하고 윤정희 씨가 누나 역할을 했어요. 1974년에 ‘어린 시절’이라는 곡이 또 영화화 됐어요. 제가 직접 연기를 했는데 꽤 흥행이 됐던 것 같아요. 1971년 이후 남진 선배와 지방공연을 다녔어요. 남진 선배가 검은 안경을 쓰고 저와 함께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했었어요."

- 양희은 씨의 아침이슬 기타를 맡으신 적도 있으시죠.

"매니저들이 양희은 씨 데뷔앨범 작업을 도와달라고 하더라고요. 김민기 씨 혼자 반주하기 힘드니까 도와달라는 것이었어요. 연습도 없이 합류하게 됐죠. 지금 생각하면 잘 맞진 않았지만 생생하고 풋풋했던 기억이 있어요. 저는 12줄 기타와 나일론 기타를 번갈아가며 쳤고, 김민기 씨는 나일론 기타만 연주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맹인가수를 레이찰스 밖에 몰랐던 시절이었어요. 그때만해도 스티비 원더가 유명하지 않았어요. 스타일이 다르지만 한국의 레이찰스라고 불리고 있네요."

- ‘한국의 레이찰스’라는 수식어가 마음에 드세요.

- 동안이신데 비결이 뭔가요.

"많은 분들이 동안이라고 말씀하시는데요.(웃음) 될 수 있으면 스트레스를 안 받으려고 노력하고 요즘 유행인 세로토닌을 자꾸 분비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모든 면에서 행복함과 감사함을 느끼려고 합니다. 세상에 보기 싫은 것들을 안 보고 살아서 젊어 보인다고 하는데 일리가 있는 말 같아요."
* 세로토닌(Serotonin) : 뇌에서 신경전달물질로 기능하는 화학물질 중 하나.

- 영화 ‘타이타닉’을 보고 감명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하셨던데요.

"저도 영화를 봅니다.(웃음) 영화 ‘타이타닉’을 상영할 때 보러간 적이 있어요. 영화가 감동적이더라고요. 제가 방송에서 ‘타이타닉’을 보고 감동 받았다고 하니까 웃으시더라고요. 그런데 농담이 아니고 실제로 영화를 봤습니다. 더빙 영화가 많았으니까 들었다고 해야 정확할까요. 듣기만 해도 내용을 알 수 있고 정황이 그려지기 때문에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요즘엔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화면 해설과 봉사자들이 많이 있어서 많이 편해졌습니다."

- 2000년대에는 어떻게 지내셨나요.

"제가 2001년에 양평에 비행기 카페를 운영했어요. 초창기에 하지는 않았고 끝 무렵에 했어요. 초창기에는 장사가 엄청 잘됐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운영할 땐 미사리와는 관계없이 손님이 많았어요. 호텔식으로 운영을 해서 인기가 좋았어요. 몸은 좀 힘들긴 했지만 재밌는 추억이죠. 비행기 카페 밑에 간이 스튜디오를 꾸몄어요. 거기서 시간 될 때마다 작업을 해서 2003년에 ‘있는 모습 그대로’라는 곡으로 앨범을 발매했고, 2010년 ‘바람 부는 날’, 2011년 ‘막걸리 추억’라는 앨범을 냈습니다."

- 막걸리 좋아하세요?

"배불러서 별로 안 좋아해요. (웃음) ‘막걸리 추억’이라는 곡은 잘 아는 개그맨 최용준 씨의 이야기입니다. 할아버지 막걸리 심부름을 갔다가 주전자가 넘쳐서 홀짝홀짝 마시는 이야기를 해줬는데 재밌더라고요. 곡은 제가 쓰고 작사는 그 친구 이름으로 해서 노래가 나오게 된 거죠. 사실 막걸리보다는 할아버지의 추억이라고 할 수 있어요."

- 체력관리는 어떻게 하세요.

"옛날엔 승마, 골프, 스노클링을 많이 했었죠. 요즘도 여름이면 바다에 들어가서 스노클링하고 노는 것이 취미에요. 남태평양 바다가 너무 좋거든요. 이번 설날에 다녀오려고요. 가게는 잠시 쉬고요."

- 요즘 운영하는 카페는 잘 되시나요?

"재밌어요. 감당하기 힘든 손님도 있지만 보람을 가지고 임하고 있습니다. 저를 기억하고 오시는 분들이 많아서 좋습니다.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싶어요. 순수하게 음악 하는 사람들이 와서 즐기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어요. 그 분들이 만들어 주리라는 생각입니다. 힘들어도 일하는 것이 건강에 좋으니까 재밌어요."

- 요즘 음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요즘 음악 좋죠. 완성도도 있고 나름대로 깊이도 있고요.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음악이 너무 만들어진다는 거죠. 음악적으로 좋은 음악이 아니라 너무 비주얼적인 면에 의지를 하니까 조금 아쉽습니다. 사람들의 모든 정서를 필터링 없이 내보내니까요.
요즘 세대들은 20~30년 뒤에 추억할 노래가 없을 것 같아서 참 안됐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유행이 만들어지고 금방 금방 바뀐다는 것도 안타깝죠. 저 같은 경우는 40년 동안 같은 노래를 불러도 기억해주는 분들이 계시잖아요. 요즘 가수들이 30년 뒤에 지금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라는 생각도 하곤 합니다."

- 기억에 남는 팬은.

"아직도 많이 있어요. 제가 지금 운영하고 있는 가게에 찾아와서 특히 남자분들이 제 손을 꼭 잡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지난번엔 대구에서 저도 없는 겉표지가 거의 닳은 LP를 가져오셔서 사인을 해달라고 하셔서 감동을 받았던 적이 있어요. 제 팬들은 마니아층이 두텁죠."

- 후배 중에 눈여겨보는 가수는 있나요.

"특별하게는 없습니다. 잘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까요. 노래와 비주얼, 끼가 있어야 해요. 특히 요즘엔 그런 끼가 음악과 더불어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니까요. 노래만 잘한다고 해서 어필할 순 없잖아요. 노래만 잘하면 인기를 끌긴 힘들죠."

- 향후 활동 계획은.

"방송에 나가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용기가 잘 안 생기네요. 편한 게 좋다보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저는 카페를 운영하면서 노래하고 손님들과 소통하는 것이 좋습니다. 좋은 곡 있으면 앨범을 낼 의향은 있습니다."  

한 때 잘 나가는 스튜디오 사장이었어요.

 가수 이용복은 1985년 가수 활동을 잠시 접고 녹음실을 운영했다. 1985년부터 2000년까지 운영했다고 하니 꽤나 긴 시간이다. 거쳐 간 가수와 사랑 받은 노래들도 많다. 가수 김수철의 ‘변심’과 ‘정신차려 이 친구야’라는 곡도 이용복의 녹음실에서 작업을 해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90년대에는 임종환의 ‘그냥 걸었어’, 박강성의 ‘내일을 기다려’, 박완규의 ‘lonely night’, 영턱스 클럽의 ‘못난이 콤플렉스’ 등 들으면 알만한 히트곡들이 대거 탄생했다. 이용복은 “그 때만해도 우리나라에 녹음실이 몇 곳 없었어요. 제가 운영하던 곳까지 합쳐서 4곳 정도 였으니까요. 제가 직접 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참 재미있던 시절이었어요”라며 유쾌하게 응답했다. 그는 2000년 그룹 샤크라의 ‘Hey you’라는 곡을 마지막으로 녹음실을 정리했다. 그는 인터뷰 내내 웃음을 잃지 않았지만 특히 이 스튜디오 시절을 이야기하면서는 어린아이같은 천진한 미소가 얼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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