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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문명에 가장 근본적인 비판을 가했던 사상가, 이반 일리치는 ‘의료의 한계’(Limits to medicine, medical nemesis, 1975)에서 “오늘날 건강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현대의학”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현대의학은 현대의료 체계와 제도를 포함하는 말이다. 현대의 관료적 의료제도에 예속된 우리들은 자신의 몸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의료제도에 내맡긴 채 건강과 삶을 관리당하며 살아간다.

우리를 주로 관리하는 사람들은 소위 ‘전문가’들이다. 그들의 언어는 절대적이며 정언명령에 가깝다. 30초 정도의 진단으로 그들은 우리의 건강과 생명을 판결한다. 그들이 차트에 쓰는 언어들을 이해할 길이 없다. 이해하고자 토를 달아서도 안 된다. 그들의 의료행위를 면밀히 살피거나 알고자 기웃거리다가는 면박당하기 일쑤다. 그들의 근엄한 표정에서 나온 판결은 오진의 여부 혹은 그들이 혹시 실행에 옮길지도 모르는 속임수와는 상관없이 절대적으로 관철된다.

미국식 의료체계의 기만성을 폭로했던 마이클 무어의 ‘식코(Sicko, 2007)가 우리에게 준 교훈은,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는 전혀 수용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식 의료체계의 서민에 대한 가혹한 착취의 길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의료민영화로 표방되는 의료산업의 이윤추구 논리는 그동안 그나마 간신히 지켜온 의료의 공공성을 뿌리째 훼손하며 국민의 건강권을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 분노하여 대한민국의 현직 의사인 송윤희 감독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나섰다.

그녀가 남편이 준 900만원을 들고 발품을 팔며 만들어낸 다큐멘터리 ‘하얀 정글’은,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전해 준다. 척추관협착증으로 굽은 허리를 평생 안고 살아야 하는 이옥 할머니는 중년이 넘어서도 뇌질환을 앓고 있는 아들을 보며 눈시울을 적신다. 출산할 때의 병원 측 과실로 보이는 뇌손상으로 아들은, 가난하고 병든 늙은 부모와 힘겨운 삶을 이어간다. 돈이 없어 치료를 거부당했던 회한은 아들의 삶뿐만 아니라 할머니의 인생까지 고통스럽게 관통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박진석씨는, 보통 사람들은 결코 감당키 어려운 치료비 때문에 백혈병 골수이식을 포기하고 가족을 위해 그 돈을 남긴다. 산다는 보장도 없는 자신의 치료를 위해 가족에게 엄청난 빚을 남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항암치료만으로 병이 나았다. 꼼꼼히 병원치료비를 들여다본 결과, 치료비의 절반 정도가 부당 청구된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그는, 병원과 담당의사로부터 “치료해 줬더니 뒤통수친다!”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그 후 박진석씨는 ‘한국환자단체연합회’에서 환자들의 권익보호에 앞장서고 있다.

그렇다고 이 다큐멘터리가, 선량하고 진정성으로 가득 찬 의사들이 우리들 곁에 전혀 없는 것처럼 얘기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의사들 개개인의 성향이나 가치관, 혹은 품성이 아니라 그들의 의술에 가혹하게 짐 지워진 상업적 의료체계다. ‘하얀 정글’이 근본적으로 다루고 있는 종착점은, ‘하얀’ 가운으로 포장된 의료체계가 자본의 ‘정글’에서 사회적 약자들을 지배하고 유린하는 의료산업의 현실, 그리고 그 배후에 있는 대자본과 국가시스템인 것이다.

영화의 도입부분에,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받는 한 사람의 손이 나온다. 그 손은 영화의 마지막에서 천장을 뚫어 물을 콸콸 쏟아지게 한다. 몇 방울의 물을 담는 것과 같이, 이윤추구에 혈안이 된 의료산업의 수혜를 받기 위해 마음 졸이며 기다리기보다는 부조리한 현실에 균열을 가해 우리들의 권리를 찾자는 메시지일 것이다. 통제와 관리에서 벗어나는 길은 결국 자율과 공생밖에 없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으로 자유무역이라는 미명하에 자행될 미국식 의료민영화의 공포가 곧 우리들에게 들이닥칠지도 모른다. 이러한 현실에서 ‘하얀 정글’은, 영리와 이윤을 향해 질주하는 우리 사회의 의료산업 체계에 맨몸으로 맞선다. 투박하지만 진정성이 빛나고, 가난하지만 풍요로운 다큐멘터리다. 진정, 용기 있는 작품이다.

영화평론가·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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