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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나의 필름포커스]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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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02-19 19:31:19 수정 : 2009-02-19 19:3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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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버린 사랑이 선사한 또다른 관계 소중한 것은 없어져야 그 가치를 안다고 했던가. 사랑이 그렇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서성이며 머무는 것이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이다.

29세 독신 여성의 불안을 피아프의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가 깔리는 도취의 춤으로 그려낸 ‘파니 핑크’. 이어 ‘내 남자의 유통기한’에서 일본풍 로맨스를 그려낸 도리스 되리가 이번엔 노인의 사랑을 일본문화의 정취 속에 풀어낸다.

암 말기로 시한부 삶을 영위하는 루디(엘마어 베퍼). 규칙적으로 살아온 모범생 공무원이지만 무뚝뚝하고 재미없는 남자이다. 그의 아내 트루디(하넬로레 엘스너)는 일본에 가서 부토춤을 추고픈 꿈을 접고 그를 돌본다. 겉으론 평생을 같이 산 평화로운 노부부이다. 그러나 한 꺼풀 벗기고 들어가면 아내의 억압과 남편의 깨닫지 못한 사랑이 착종되어 있다.

우리 모두 시한부 삶이기에 의학적 판정에 따른 시한부만 먼저 떠나란 법은 없다. 바로 그런 돌연변수가 발생한다. 남편이 죽기 전 아이들을 보러 방문한 베를린 여행 후 오히려 아내인 트루디가 먼저 세상을 떠난다. 오즈의 걸작 ‘동경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대목이지만, 본론은 이제부터다. 늙은 부모를 부담스러워하는 자식들 이야기는 식상하니까. 남겨진 시한부 남편은 홀로 아내의 접은 꿈을 느끼려 일본으로 떠난다.

루디는 아내의 해원굿을 하듯 도쿄를 떠돈다. 아내의 옷을 코트 속에 입고, 아내가 그렇게 추고파 했던 부토를 드디어 만난다. 부토는 명상과 몸짓이 자연스레 어우러지면서 영혼의 자유를 표현하는 그림자 춤이다. 게이샤 같은 흰 분칠을 하고, 남루한 기모노를 입은 채 전화기 코드와 몸을 일치시키며 부토를 추는 유(아야 이리즈키)와의 만남은 영화보기의 정점을 이룬다. 홈리스 부토춤꾼 유와 루디가 나누는 우정은 후지산으로 이어진다.

이 독특한 관계는 세상의 상식적 관계방식을 넘어선다. 나이 든 부르주아 서구 남성이 완전히 다른 존재, 그러니까 일본의 홈리스 어린 여자와 소통한다는 것. 거기로부터 이성애 로맨스를 넘어서는 관계의 창의성과 묘미가 우러나온다. 아들은 아버지의 정신상태를 의심하지만 루디는 부토를 통해 떠나간 아내의 사랑을 절감한다. 사랑이 떠나간 후 음미하는 또 다른 차원의 사랑법이다.

사람들은 사랑을 못해 안달이 나고, 사랑에 빠지면 흥분과 불안을 오가지만, 사랑 후에 대해서는 대책이 없다. 사랑을 욕망한다면 사랑 후에 대하여, 즉 사랑의 그림자조차도 소중하게 기려야 한다는 예지, 그런 스피릿이 도리스 되리의 시선을 통해 마음속에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동국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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