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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약집에도 없는 약자들] 디지털 특수고용자를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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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5-16 19:29:54 수정 : 2017-05-16 22: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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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계약서도 안 쓴 ‘철가방’… 최저임금은 ‘그림의 떡’/ 배달앱 알바 대부분 ‘주먹구구 계약’/ 앱 이용 수수료 인상 등 갑질에 무방비/ ‘주문 순위 밀릴라’… 이의 제기도 못해/ 특수고용직 해당돼 근로감독 어렵고
신분·업종 불명확… 고용통계 안 잡혀
수많은 공약이 쏟아진 대통령 선거를 거쳐 지난주 새 정부가 출범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집만 해도 200쪽가량 됩니다. 문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인천공항공사를 찾아 공사 소속 비정규직 1만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공약과 정책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자신의 이야기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득표에 별 도움이 안 된다고, 혹은 이슈가 되지 않거나 잊혀진 사건이어서 외면받은 것입니다. 이들의 목소리를 전하기 위해 ‘공약집에도 없는 약자들’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제가 1인 사업자라고요? 근로계약서도 써본 적이 없는데….”

아내와 소규모 유통점을 운영하는 A(46)씨는 2년 전부터 부업으로 모바일 앱을 이용한 음식 배달을 하고 있다. 본업의 수입이 변변치 않아 시작했는데 지금은 시간 투입이나 벌이 면에서 ‘배달 부업’이 절반을 넘어설 정도다. 그동안 음식점 업주들이나 배달앱 업체 관계자와 신뢰를 잘 쌓은 덕분에 점심과 저녁 시간 전후를 중심으로 하루 평균 8시간 배달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배달앱 업무와 관련해 근로계약서를 작성해본 적은 없다. A씨는 “부업이라고 생각해서이기도 하지만 하루에 일한 만큼 바로바로 입금이 되는 터라 근로계약서에 대한 필요성을 느껴본 적이 별로 없다”고 말했다. ‘베테랑’이 되면서 근로 시간이나 장소에 얽매이지 않고 업무량을 조절할 수 있다는 점에서 ‘괜찮은 일’이라고 여길 법도 하다. 그러나 업무 내용과 계약조건을 놓고 자세한 얘기를 나눌 수록 표정이 어두워졌다.

배달앱 업체와 배달 종사자는 일대일의 자유 계약 관계인 것처럼 보이지만 주먹구구식으로 관계를 맺다 보니 업체 측의 뜻대로 하는 경우가 많다. 종사자 개인이 불합리한 내용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게 쉽지 않은 구조다. A씨는 “배달업무 특성상 배달할 메뉴와 거리가 제각각임에도 업체 측이 일률적으로 정한 배달료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배달앱 이용자 입장에서는 단순한 서비스로 보이지만 배달하는 쪽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대리운전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대리기사가 도착하기 전까지 대리운전앱과 중개 콜센터를 거치듯 배달앱(업체)을 통해 주문을 접수한 뒤 음식점에서 음식이 마련되면 배달 대행업체에서 배달 기사를 보내는 식이다.

이 과정에서 배달앱 종사자는 앱 이용료와 운송 장비에 관한 비용, 각종 보험료 등 부담할 내역이 늘어난다. A씨의 업체에서는 올 들어 갑자기 상조회를 꾸려 가입을 시키기 시작했다. 매일 2000원씩 한 달에 6만원가량이지만 주문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등 불이익이 우려돼 가입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배달 한 건당 앱 이용 수수료도 200원에서 올해 300원으로 올랐다. A씨는 “이 일을 시작할 때에 비해 주문 건수와 배달 기사가 두 배 이상 늘어난 것 같은데 수수료나 보험료가 계속 오르고 있다”며 “문제제기를 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라고 털어놨다.

A씨의 배달앱 주문은 평일에 30∼40건씩이고 주말에는 10건 정도가 추가된다. 전업 종사자는 보통 하루에 60∼80건을 소화하고 잘 되는 사람은 100∼200건도 한다. 한 달에 잘 하면 400만∼500만원도 벌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배달 중에 교통사고 등 돌발상황이 생기면 타격이 크다. 정부가 표준계약서를 작성하도록 유도하고 있지만 잘 지켜지지 않는 탓이다.

이 때문에 10대나 20대 배달원들은 며칠 만에 그만두기도 한다. A씨처럼 중장년층이 아닌 바에야 배달앱 업계에서 6개월 이상 경력자가 많지 않은 이유이다.

근로감독이 이뤄지더라도 적용할 근거가 미약해 정부의 개입도 쉽지 않다.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은 경우야 말할 것도 없고, 특수고용직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근로기준법을 적용하기 힘들다. 시간당으로 산정하는 기존 계약 방식과 달리 1건당으로 산정하면 최저임금법마저 무력화된다. 최저임금이 1만원으로 오른다 해도 이들에게는 ‘그림의 떡’인 셈이다.

정부는 배달앱과 같은 디지털 플랫폼 노동을 4차 산업혁명과 관련한 새로운 분야로 분류하고 있지만 실태 파악조차 제대로 안 된 상태다. 정부는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조사와 고용노동부의 사업체 노동력 조사, 고용보험 데이터베이스(DB) 등을 활용해 고용실태를 파악하고 있다. 방문조사 방식의 경제활동인구조사의 표본에는 자영업자나 무급 노동자(가족) 등이 포함되기도 하나 업무 시간과 장소가 불규칙한 배달앱 종사자들은 빠질 공산이 크다. 결국 정부가 정례적으로 실시하는 모든 조사에서 이들은 잡히지 않는다는 얘기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현행 고용 통계의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해 연구 용역 등 다양한 노력이 진행 중”이라며 “하지만 개인정보보호의 가치와 상충하는 데다 방식과 목적이 제각각인 부처별 통계를 일원화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이는 새로운 직종인 푸드트럭이나 또 다른 플랫폼 노동자인 대리운전 등도 마찬가지다.

배달앱 종사자들은 근로자 신분뿐 아니라 업종도 불명확하다. 기본 업무가 배달이기 때문에 운수업으로 볼 수 있지만 음식점과 모바일앱과 관련된 점을 따진다면 음식업종이나 IT(정보기술)업종에 포함될 수도 있다.

이렇다 보니 정책적으로 소외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고용형태는 골프 캐디나 방문학습지 교사와 같은 특수고용직인데다 새로운 디지털 플랫폼 유형인 탓에 사각지대의 골이 깊어지는 셈이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김종진 연구위원은 “규제를 회피하면서 사업체 운영의 효율을 높일 수 있는 방식으로 노동시장 유연화가 급속하게 진행 중”이라며 “플랫폼 노동자를 보호할 수 있도록 제도적인 정비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김준영 기자 papeniqu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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