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주목, 이사람] '환상성' 가미한 소설로 극찬받는 신예작가 황정은

입력 : 2008-09-17 17:23:00 수정 : 2008-09-17 17:23:00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글 쓰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어요"
◇소설가 황정은씨는 “나에게 소설 쓰기는 주변을 객관화하고, 세상에 대한 냉소를 걷어내 타인과 대화할 수 있도록 도와 준다”고 말한다.
문학동네 제공
소설가 황정은(32)씨의 단편 ‘모자’는 돌연 모자로 변신하는 아버지 이야기이다.

실직자가 되어 자식에게 라디오조차 사줄 수 없을 때 아버지는 졸지에 모자가 돼 버린다. 또 다른 단편 ‘오뚝이와 지빠귀’에서는 점차 몸이 작아져 오뚝이로 변해 가는 은행원이 등장한다.

황씨의 작품을 이야기할 때 환상성이 자주 거론된다. 그래서 그를 만난 자리에서 환상성, 카프카적 상상력, 명랑성 운운했더니 작게 한숨을 쉰다.

“평론가들은 이론화해서 규정하는 것을 참 좋아해요. 서평 쓰는 기자들도 그런 것 같아요. 제 작품에 대한 단정적 해석을 들을 때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불편합니다. 전 환상성을 내세운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소설을 쓰는 수많은 작법 중 하나를 골라 쓸 뿐입니다. 사실적인 묘사에 치중할 수도, 내면세계 혹은 상상력에 의존할 수도 있지요.”

그의 말대로 그가 발표한 작품들은 성격이 제각각이다. 올해 펴낸 첫 소설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문학동네)는 그가 걸어온 자취를 한눈에 보여준다. 200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인 ‘마더’는 생모에게 버림받은 채 병든 개와 동거하는 자살 사이트 회원의 이야기다. 등단 직후 발표한 ‘소년’ ‘벽’ 등은 등단작처럼 현실의 비참한 면을 환상성 없이 그린다. 소설 속 인물은 공용화장실에 전구가 없어 수챗구멍에 오줌을 누거나(‘벽’), 쪽방에 잠든 사이에 쥐에게 정수리를 갉히기도 한다(‘소년’).

2005년 가을에 발표한 단편 ‘무지개풀’을 기점으로 그의 작품은 변모한다. 이후 ‘모자’ ‘오뚝이와 지빠귀’ ‘곡도와 살고 있다’ 등 이른바 환상성이 가미된 작품들을 줄줄이 선보인다.

“‘소설을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소설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을 때는 그저 기본기에만 충실하게 됩니다. 조금씩 틀을 벗어나면서 소설 쓰기의 자유스러움을 깨닫고 있어요. 젊을 때는 조금 ‘싸가지 없게’ 써도 될 것 같아요.”

그는 소설가가 된 이유를 “글쓰기 말고 할 게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런 답변은 ‘난 작가의 운명을 타고났어’란 자부심을 에둘러 표현할 때 왕왕 쓰인다. 하지만 황씨의 경우는 말 그대로이다. 그는 재기하기 힘들 정도로 몸이 망가졌다. 몸무게가 40㎏ 초반이었으며 숟가락질할 때도 손이 바르르 떨렸다. 펜으로 글자를 쓰는 일이 그나마 가장 쉬웠다.

“대학 신입생 때 장구를 배웠어요. 장구 울림을 들을 때마다 무아지경이 되는 거예요. 극단적으로 장구에 매달렸지요. 결국 1년 만에 심장이 고장났고, 영양실조, 갑상선 질환에 걸렸습니다. 한 4년간 걷지 못해 아버지가 절 업고 다녔어요. 몸이 회복됐을 때 뭔가를 강렬하게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게 소설이었어요. 전문가에게 평을 들어보고 싶어 신춘문예에 응모했는데, 당선이 된 거예요.”

그가 장구에 몰두한 건 현실을 잊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그의 가정환경은 명랑하지 않았다. 유년시절에는 정신적으로 불안한 어머니에게 마구 맞아 고막이 손상됐고, 중·고등학교 때는 학비를 못내 늘 초라하게 불려다녔다. 그는 “중3 때 살림이 크게 엎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버지가 선 빚보증이 잘못돼 오랫동안 궁핍하게 살았다. 비참한 가난을 잊으려고 장구에 미친 것인지도 몰랐다.

“오해 마세요. 전 한 번도 가난에 신경 써 본 적이 없어요. 제겐 물건에 대한 욕심이 아예 없어요. 한달 20만원이면 충분히 살아냅니다. 제겐 가난보다 훨씬 절박한 게 너무도 많았어요. 고통은 상대적인 건데, 그걸 함부로 평가하기 때문에 불쾌한 오해나 동정이 생기는 겁니다.”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는 현재 종로 세운상가에서 음향기기를 수리하고 있다. 기술이 좋으면서도 돈 욕심이 없어 살림은 늘 빠듯하다. 그는 얼마 전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아버지 이야기를 하다가 울컥한 적이 있다. 그의 아버지는 평생 살려고 발버둥쳤지만 손해만 봤다. 사고까지 당해 한쪽 다리도 절뚝거린다. 소설 ‘모자’에 나오는 무기력한 아버지는 곧 작가 자신의 아버지다. 그에게 모자로 변하는 아버지는 환상성이나 현실 도피로 설명될 수 없다. 아버지는 모자가 돼서도 그 자리에서 모멸감을 다 받아내는 슬픈 존재다.

“아버지를 떠올리면 눈물 나지 않나요?”

그의 시련은 문신처럼 몸에 남아 있다. 아직 어머니 근처에 가지 못하고, 사람이 곁에 있으면 잠을 자지 못한다. 혹 염세와 혐인에 빠진 건 아닌지 물었다. 그는 “염세주의는 오만한 자세”라고 단언한 뒤 “언젠가 밝은 순간이 찾아오기 마련”이라고 답했다.

불리한 환경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며 어둠 속의 빛을 얘기하는 황정은씨. 니코틴의 힘이라도 빌리는 게 아닐까.

“담배는 안 피워요. 견딜 수 없는 큰 불행이 오면 그때 피우려고 아껴두고 있어요.”

그는 담배 없이도 글을 술술 써 나간다. 요즘에는 죽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 많이 앓다 돌아가신 할머니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그에게 소설 쓰기는 제 손으로 할 수 있는 ‘자랑스러운 기술’이자 위안을 얻는 친구다. 그도 인간인 이상, 불행과 고통에 태연할 수는 없다.

“저도 가끔 우울증에 빠져요. 제가 이만큼 대화할 수 있는 건 소설 덕분이에요. 소설 쓰기는 사물을 객관적으로 보게 하지요. 냉소하지 않게 돼요. 제 동생들도 현실에 대한 원망 때문에 폭발할 때가 있어요. 그럼 제가 말하지요. ‘애들아, 너희도 소설 한번 써 봐’.”

심재천 기자 jayshim@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트리플에스 지우 '매력적인 눈빛'
  • 트리플에스 지우 '매력적인 눈빛'
  • (여자)이이들 미연 '순백의 여신'
  • 전소니 '따뜻한 미소'
  • 천우희 '매력적인 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