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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숨에 이루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시간을 견디며 기다릴 줄 알아야
낭만주의 문학의 거장 빅토르 위고는 1861년 6월30일 아침 8시30분, 창문 너머 비쳐드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아, 나는 레미제라블을 끝냈다네. 이제는 죽어도 좋다’고 중얼거렸다. ‘불쌍한 사람들’로 번역되는 레미제라블은 프랑스 문학사상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받는 빅토르 위고가 30년에 걸쳐 완성한 대작이다. 미국의 여류작가 마거릿 미첼이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쓴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집필기간이 10년이나 걸렸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다시 떠오른다’는 여주인공 스칼렛 오하라의 독백처럼 이 소설은 ‘인생에 있어서 이겨낼 수 없는 고난은 없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작품은 1937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프랑스 소설가이며 영화감독인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는 작품 집필에만 12년이 걸린 책이다. 사랑과 반역, 생존을 위한 투쟁이 고스란히 숨어있는 개미의 세계를 추리적 기법을 가미해 세밀히 묘사한 역작이다.

조연경 작가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는 광복 이후 한국문학이 거둔 최대의 수확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집필기간이 26년이다. 최명희의 대하소설 ‘혼불’은 17년간 혼을 쏟아 그려낸 민중의 애환과 고뇌가 녹아 있다. 마치 한땀 한땀 수를 놓듯 꼼꼼하고 정확하게 표현한 문장은 많은 독자에게 신선한 경이로움으로 다가왔다.

이렇듯 훌륭한 작품은 결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하긴, 메주로 장을 담그는 일도 충분한 숙성기간이 필요하고, 도자기를 굽는 데도 알맞은 시간이 주어져야 금이 가지 않는데 하물며 모든 이에게 사랑받는 문학작품이 짧은 시간에 어찌 완성될 수 있겠는가. 위대한 작품일수록 작가가 자신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쏟아붓는 열정과 고뇌의 긴 시간이 있다.

비단 문학 작품만이 아니다. 세상을 살면서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 참 많다. 김장 김치가 맛있게 익는 시간부터 시작해서 한 건물이 완성되는 시간, 공연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연습하는 시간, 원하는 대학을 가기 위해 책과 씨름하는 시간. 그러나 속전속결에 익숙해진 우리는 충분히 시간을 주지 않고 빨리빨리 끝내 버리려 하고 여의치 않으면 쉽게 포기하고 만다. 실패라고 생각하기 전에 후회 없을 정도로 오랜 시간 열정을 다해 혼신의 힘을 쏟아부었나 스스로 냉철하게 점검할 필요가 있다. 그게 아니면 다시 시작해야 한다. 위대한 문학작품이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듯이 단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은 사물뿐만 아니라 사람의 감정에도 해당된다. ‘사랑하기’와 ‘상처치유’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사랑은 나무와 같다. 묘목은 오랜 시간 알맞은 햇살과 적당한 물과 양분을 주며 잘 돌봐야 큰 나무로 자랄 수 있다. 첫눈에 상대를 알아보는 운명 같은 사랑도 있을 수 있지만 오랜 시간 서로에게 정성을 다해야 깊은 뿌리를 내려 어떤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사랑으로 자리 잡는다. 요즘 사랑은 가스불 위에 올려진 양은냄비처럼 쉽게 바글바글 끓고 쉽게 식는다. 성장의 시간이 생략됐기 때문이다. 상처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살면서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한다. 상처가 너무 쓰리고 아파 빨리 떨쳐내려고 애를 쓴다. 그럴수록 상처는 지독한 채권자처럼 더 달라붙는다. 시간이 필요하다. 상처의 빛깔이 점점 옅어져 어느 날 스르르 사라지는 시간이. 그 시간을 견디며 기다릴 줄 알아야 비로소 상처에서 벗어난다.

‘필요한 만큼 시간을 주는 일’, 그것이야말로 위대한 문학작품처럼 나 자신을 성큼 자라게 한다.

조연경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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