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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천일의 앤과 장희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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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10-01 19:13:13 수정 : 2010-10-01 19: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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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장희빈 당당한 현대여성상 반영
희빈의 초라한 최후 앤과 대비돼
대부분의 남자들이 가지고 있는 로망이 하나 있다. 과거로 돌아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왕의 삶을 대신 살아보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그 대상을 고르려고 하면 선택의 폭이 좁아진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행복한 일생을 보낸 왕들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서양은 영국의 헨리 8세나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나은 편이고 조선시대 임금들 중에는 세종이나 숙종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실상 따지고 보면 이들의 삶도 그리 평탄하지는 않았다. 특히 헨리 8세와 숙종은 자신의 왕비를 죽이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허구생 서강대 국제문화교육원장
근대 영국을 건설한 헨리 8세는 6명의 왕비를 둔 것으로 유명하다. 이를 두고 부러워할 남자들이 있겠지만 사실을 알고 보면 사정이 달라질 것이다. 두 명이 처형당했고 두 명이 이혼당했으며 한 명은 사별했다. 이 중에서 가장 인구에 회자되는 인물은 두 번째 왕비인 앤 볼린이다. 1969년 만들어진 ‘천일의 앤’은 앤과 헨리의 사랑과 결혼, 그리고 대역죄로 머리가 잘리는 비극적 결말을 다룬 작품이다. 당대 최고의 배우 리처드 버튼과 주느비에브 부졸드가 열연한 이 영화는 아카데미 10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으나 막상 시대극 의상 부문에서만 상을 받는 데 그쳤다. 그렇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기억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 ‘천일의 앤’에서 주목할 부분은 주인공 앤의 캐릭터이다. 당당하고 기품이 있으며 그 누구 앞에서도 할 말을 다하는 똑똑하고 야무진 여자이다. 프리섹스를 주장하고 사랑을 위해서는 부와 명예 따위는 얼마든지 버릴 수 있는 열정을 가졌지만, 자신의 자녀를 사생아로 만들 수 없다며 왕비가 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왕의 구애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합리적 계산을 하는 여자이기도 하다. 또한 여자도 얼마든지 훌륭한 군주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페미니스트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화 속 캐릭터가 얼마나 역사적 현실에 부합할 수 있을까. 아무리 앤이 파리와 비엔나의 궁정에서 스무 살 전후의 시절을 보내면서 선진 르네상스의 문물에 흠뻑 젖었다고는 하나 16세기의 여자가 프리섹스를 주장하는 것은 현실감이 없다. 결국 앤의 영화 속 캐릭터는 20세기의 창조물일 뿐이다. 다시 말해 영화가 아무리 400년 전 인물을 그리고 있더라도 그 캐릭터에 투영된 것은 괄목할 만큼 신장된 20세기 서구의 여권(女權)인 것이다.

한국사에서 앤 볼린에 필적하는 인물은 장희빈인 것 같다. 극적으로 왕후의 자리에 오른 것,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것, 정쟁의 희생이 된 면에서 그러하다. 요즘 그녀는 드라마 ‘동이’에서 되살아났다가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 주인공 동이와 대립하고 갈등하는 상대역할을 맡은 덕분에 과거부터 이어오는 부정적 이미지를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했지만 당당하고 야무진 이미지는 ‘천일의 앤’이 만들어낸 앤의 이미지와 흡사했다.

‘천일의 앤’에서 앤은 왕의 이혼요구를 수락하면 수녀원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었지만 그것을 거절함으로써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이혼하면 딸인 엘리자베스가 사생아가 되어 왕위계승권을 박탈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대신 그녀는 엘리자베스가 왕이 되어 영국을 대제국으로 이끄는 날을 상상하며 의연하게 죽음을 맞는다.

‘동이’에서 희빈은 자신의 아들이 세자의 지위를 확실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도모하다가 무리수를 두는 바람에 비극을 자초한다. 그리고는 동이 앞에 쓰러져 아들의 장래를 구걸하는 초라한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여기에서 죽음 앞에 당당한 앤과 초라한 희빈의 이미지가 비교된다. ‘동이’ 속 희빈의 당당한 이미지가 개선된 우리 여성의 지위를 말한다면 초라한 최후는 무엇인가. 절반의 완성이며 우리가 앞으로 남은 동이의 활약을 기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허구생 서강대 국제문화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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