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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나의 필름포커스]4개월 3주… 그리고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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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8-02-29 09:56:40 수정 : 2008-02-29 09:5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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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베르너 파스빈더 영화의 제목이지만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의 이미지가 뿜어내는 숨결을 묘사하는 데 매우 적절한 표현처럼 보인다.

‘루마니아, 1987년’이란 자막으로 시작하는 화면은 기숙사와 호텔, 황폐한 거리를 오가며 낙태를 두고 전전긍긍하는 두 여자와 한 남자의 관계, 그리고 그들 각자의 내면을 통과한다. 루마니아는 1968년 이후 인구 증가를 위해 낙태를 엄격하게 금지하지만, 이곳에서도 당연히 피임하지 않은 섹스와 수많은 낙태가 은밀하게 이루어진다. 한국 역시 미혼모에 냉혹하고 낙태에 대해 관대한 나라이기에, 이 영화가 다루는 상황을 그때 그 시절 공산독재 루마니아의 일로만 치부해 버릴 수는 없으리라.

아이 낳을 처지가 못 되는 거비차(라우라 바실리우)는 친구 오틸리아(아나마리아 마린카)의 도움으로 호텔을 잡고 불법 낙태를 하려는 중이다. 시험공부한다고 사정하며 호텔 방을 찾는 게 만만치 않고 불법 시술자 베베(블라드 이바노브)가 요구한 거금을 구하는 일도 어렵다. 게다가 베베는 임신 2개월이라고 거짓말한 것을 핑계 삼아 더 많은 돈과 몸까지 요구하는 냉혈한이다. 낙태 당사자인 거비차의 불안한 심정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친구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오틸리아는 불법 행위로 감옥에 갈지 모르는 위험 속에서 노심초사한다.

군더더기 없는 이야기와 미학적 수사를 배제한 냉혹한 이미지는 담담한 관찰자의 시선에 담겨진다. 극영화에 부재하는 이런 생경함이 오히려 공기처럼 화면에 퍼져 인물들의 불안한 영혼에 관객을 접속시킨다. 흔들리는 카메라와 고정된 카메라를 번갈아 사용하면서 마치 몰래카메라처럼 연출된 이미지들은 진실성을 담보하는 다큐멘터리적 긴장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배경음악 대신 테이블 위에 ‘탁’하고 물잔을 내려놓는 소리, 헛기침 소리, 공포에 질려 박자를 놓친 거친 숨소리 등 날것 같은 이런 소리가 그대로 나오는데, 그것 역시 생중계 현장을 엿보는 격렬한 불안감의 박동을 폭발시켜 버리곤 한다. 자본주의의 느끼함이 배제된 배우들의 자연스럽고 질박한 연기도 영화의 다큐적 미덕을 최대한 살려낸다. 마치 동유럽 오페라 가수의 기교 없는 목소리가 담보하는 순결함처럼.

그리 희귀하지도 낯설지도 않은 일상의 사건들과 그림자 속에 은닉된 소중한 것들, 상처와 불안 그리고 구체적으로는 섹스와 낙태. 이런 것들을 세세하게 오랫동안 응시하는 크리스티안 문지우 감독의 길게찍기는 일상의 진실 탐구를 이끌어내는 명상적 통찰력을 이끌어낸다. 그리하여 독재에서 해방된 루마니아 영화의 약진은 영화예술은 여전히 고통을 먹고산다는 비의를 증명한다. 칸국제영화제가 이 작은 영화에 그랑프리를 준 것은 근사한 선택이었다.



영화평론가·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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