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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성국 발해는 동아시아의 대국이었다

입력 : 2012-06-22 17:38:42 수정 : 2012-06-22 17: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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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출신 중국학자 방학봉 교수 평생 연구 총망라
중국이 관변 학자들을 동원해 자국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발해는 실로 동아시아의 대단한 나라였다. 668년 당에 멸망한 고구려보다 더 강성했던 적도 있다. 당시 중국 사가들도 발해를 일컬어 ‘해동성국’이라 부르며 부러워했다. 발해에 대해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현재 전해지는 중국의 사서나 한국 고문서 가운데 유독 발해를 입증할 만한 문헌이나 실증자료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중국의 후안무치한 역사왜곡에 한국 고대 사학자들 또한 분명한 견해를 내지 못하고 있다. 고증과 실사에 의해서만 인정받는 고대 역사학의 속성상 그럴 수도 있다. 이런 척박한 발해 연구 환경에서 괄목할 만한 발해 연구서가 나와 주목된다. 연구서지만 지루하거나 딱딱하진 않다. 중국 연변대학의 주임 교수와 발해사연구소장을 지낸 저자 방학봉은 발해사 연구에 평생을 건 조선족 출신 중국 학자다. ‘발해의 강역과 지리’는 그의 평생 연구업적을 망라한 것이다.

방학봉 지음/정토출판/2만2000원
발해의 강역과 지리/방학봉 지음/정토출판/2만2000원


1930년 길림성 화룡현에서 태어난 방 교수는 “1949년 연변대 역사학부 학생 시절 발해 3대 문왕의 딸 정효공주(貞孝公主·757∼792)묘 발굴작업에 참여하다 엄청난 규모의 발해 역사에 매료돼 평생 동안 연구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중국 사학계에서도 ‘발해왕’이란 별명을 얻을 만큼 줄곧 발해사 연구에 매진해 왔다.

팔순을 넘긴 그는 “지금 나이에 무슨 민족이니 뭐니 할 필요가 뭐가 있나. 편견이나 예단 없이 오로지 학자적 양심과 고증에 따라 발해사를 연구해 책을 썼다”고 강조한다. 그는 발해에 대해 “거란·말갈·돌궐·해 등 여러 부족들과 연합하여 당나라 침략과 통치에 저항해 698년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5경 15부 62주를 설치해 229년간 통치한 동아시아 대국”이라면서 “발해사는 아직 밝혀진 부분보다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훨씬 많다”고 했다.

방 교수가 인용한 고서적은 당나라 정사인 10세기경의 ‘구당서’와 송대 ‘신당서’를 비롯해 중국 쪽 정사 25권을 포함한 100여권에 이른다. 신당서보다 더 권위를 인정받는 구당서에 따르면 고구려를 중국과 구별된 나라로 규정한다. 한족 중심의 중국과 동이족이 다수를 차지한 고구려는 과거부터 동아시아 패권을 놓고 쟁패했다고 적혀 있다. 이는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중국 쪽 학자들의 주장과 정면 배치되는 사실이다.

1984년 중국 길림성 사회과학원 부원장이던 왕승례가 쓴 ‘발해간사’에 나온 발해 강역도.
발해 강역은 동쪽은 바다(동해)에 닿고 서쪽은 거란(요서)과 접했으며, 남은 신라와 접하여 패강(대동강) 일대에 미쳤다. 서남쪽은 요하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차지했고, 북쪽은 흑수말갈(연해주 북쪽)에 이르렀다. 방 교수는 특히 대조영과 당군이 북방의 패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툰 부분을 묘사했다.

발해가 빠른 시일 내에 넓은 강역을 차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패권적인 당나라에 반대한 당시 국제정세 때문이었다.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들은 당 통치에 맞서 치열한 투쟁을 벌였으며, 이는 당시 북방 민족들의 공통적 염원이었다.

구당서와 신당서 등은 분명히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당·신라 연합군의 침략으로 영주(베이징 부근 추정)에 강제 이주한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들은 고구려의 별종인 걸걸중상과 대조영, 말갈 추장인 걸사비우의 영도 하에 당 통치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켰다. 걸걸중상이 죽자 대조영이 통일 지휘하여 천문령에서 이해고가 거느리는 당 추격군을 물리치고 진국을 건립했다.

평생 발해를 연구해 온 연변대 방학봉 교수가 발해를 풀이하고 있다.
구당서 발해말갈전에도 “(대)조영이 고구려와 말갈의 무리를 합하여 (이)해고를 치니 왕군은 대패하고 해고는 몸을 빼어 돌아갔다. 조영은 동으로 나아가 고지를 확보하고 동모산에 의지하여 성을 쌓고 살았다. 조영은 용맹스럽고 용병술이 뛰어났다. 이에 흩어졌던 고구려인과 말갈인들이 모여들었다. 조영은 스스로 진국왕이 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북방 유민들에 널리 퍼져 있던 항당투쟁 열기는 대조영이 급속히 기반을 닦아 나라를 세운 자양분이 된 것이다.

때마침 진행된 당의 쇠락과 국제환경도 대조영의 발해 건립을 도와주었다. 당시는 고구려의 옛 영토와 말갈 영토에 대한 당의 통제력이 크게 약화된 시기였다. 당나라는 돌궐과 시도 때도 없이 전쟁을 벌였고, 신라도 오랜 전쟁으로 국력이 쇠약해져 발해의 남하를 막을 수 없었다. 대조영은 건국 10년 사이에 고구려 옛 영토와 말갈 영토를 대부분 수복할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해 재야사학자 남주성씨는 “청대 건륭제가 편찬한 ‘흠정만주원류고’에는 고구려의 장군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해 나라를 세웠으며 청은 발해를 잇는다고 기술돼 있다”고 증언했다. 흠정만주원류고는 중국의 정사 가운데 하나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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