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神이 내린 가혹한 운명…인간은 진실로 저항할뿐

입력 : 2012-05-16 18:32:52 수정 : 2012-05-16 18:32:52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영화 동명 연극 ‘그을린 사랑’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지나간 어린 날들이 비수처럼 내 목에 꽂혀 있다. 그것은 쉽게 뽑히질 않아.”

아들의 아이를 낳은 어미는 삶에 대해 무슨 말을 할까. 아들에게 강간당해 쌍둥이 남매를 낳은 나왈 마르완은 침묵했다. 그녀가 기나긴 세월 동안 유일하게 말할 수 있었던 건 침묵뿐이었다. 삶의 색채를 잃어버린 어미는 유언장에 “내 무덤에는 비석을 세우지 말고 어디에도 내 이름을 새기지 마라. 약속을 지키지 못한 이들을 위해서는 어떤 묘비명도 세워서는 안 된다”고 적어 놓으며 자신을 벌했다. 그녀는 “얼굴을 아래로 하고 매장할 것”을 주문하며 영문을 모르는 남매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아랍 세계에서는 삶을 떳떳하게 살지 못한 자들에게 땅을 향해 묻히는 중벌을 내린다. 상처받은 여인은 스스로 대가를 치를 것을 택했다.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 ‘그을린 사랑’.
레바논에서 태어나 현재는 캐나다 작가 겸 연출자로 활동하고 있는 와즈디 무아와드의 희곡 ‘그을린 사랑’이 6월 5일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오른다. 국내에서는 지난해 예술영화 최다 관객 동원을 기록하며 화제를 모은 동명의 영화(드니 빌뇌브 감독)로 먼저 알려진 작품이다. 15일 명동예술극장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배우들은 “작품의 무게와 깊이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며 “한 여인의 비극을 통해 삶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게 됐다”고 말했다.

‘그을린 사랑’은 쌍둥이 남매 시몽과 잔느가 어머니의 유언을 듣기 위해 공증인을 만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남매는 공증인으로부터 어머니가 쓴 두 통의 편지를 받는다.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형제를 찾으라는 메시지다. 어미는 진실의 봉인을 풀고 아이들에게 판도라의 상자를 열라고 주문한다. 아버지가 형이고, 형이 아버지인 끔찍한 진실은 남매의 평범한 삶과 온건한 인격에 영향을 미친다. 어미는 왜 가혹한 진실을 마주보게 하려는 것일까.

김동현 연출은 “극은 비극적인 운명을 인간 의지로 ‘어떻게 감당할까’를 이야기한다”며 “주인공은 신을 능가하는 인간 의지와 저항 정신으로 죽기 직전 침묵을 깨고 진실을 알리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상대가 누군지 모른 채 어미를 범하는 죄는 신이 계획하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일. ‘그을린 사랑’은 오이디푸스 신화의 모티브와 맞닿아 있지만, 작품의 주인공 나왈은 신의 계획대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오이디푸스와 달리 삶에 화해를 청하고 아이들을 통해 용서를 구한다. 

연극 ‘그을린 사랑’의 40대 나왈로 분한 배우 배해선.
나왈은 14세에 낳은 아들을 할머니에게 빼앗기고 이후 아들을 찾아 나서지만 폭격당한 고아원에서 눈물만 흘리게 된다. 운명은 두 사람을 전범수용소에서 죄수(나왈)와 사형집행인(아들)으로 만나게 한다. 사형집행인은 죄수를 굴복시키기 위해 범한다.

‘그을린 사랑’은 보여주기 방식을 취한 영화와 달리 유려한 언어로 인간의 웅숭 깊은 내면을 끄집어낸다. 침묵하는 인간이 왜 침묵하는지를 고통스러운 언어로 전달한다. 김 연출은 “희곡과 영화는 본질적으로 똑같은 모티브와 서사를 지녔지만 희곡에서는 말이 사건이고 심리다. 연극은 시적 표현과 풍부한 대사로 깊이와 밀도를 만들어 낸다”고 설명했다.

그는 “연극적인 요소는 존재의 근원을 묻는 데 더 유용할 수 있다”며 “작품에서 1인 다역을 맡은 배우들을 통해 다분히 연극적인 아이로니컬한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의사를 맡은 사람이 누군가를 죽이는 저격수를 동시에 맡게 되면 ‘삶이란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된다”고 말했다.

극에서 엄마의 과거를 찾아 여행하는 남매는 1인 다역을 맡은 여러 인물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남매에게 “다른 사람을 찾아가라”고 말하지만, 결국 같은 인물이 모습을 바꿔 다시 남매를 만난다. 인간은 운명의 쳇바퀴를 돌며 삶을 개척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운명과 비극을 헤치고 주인공 나왈은 말한다. “그 어떤 것도 함께 있는 것보다 아름다울 수 없다”고. 그녀는 잃어버린 아들, 자신을 강간한 아들, 쌍둥이 남매의 아버지인 아들에게 “네가 태어난 순간부터 널 사랑했다”는 유언장을 남긴다. 7월 1일까지 2만∼5만원 1644-2003

이현미 기자  engine@seyg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트리플에스 지우 '매력적인 눈빛'
  • 트리플에스 지우 '매력적인 눈빛'
  • (여자)이이들 미연 '순백의 여신'
  • 전소니 '따뜻한 미소'
  • 천우희 '매력적인 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