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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눈을 잃어가는 남녀의 ‘슬픈사랑’

입력 : 2011-11-11 19:46:10 수정 : 2011-11-11 19:4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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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장편소설 ‘희랍어 시간’ “인간의 가장 연한 부분 얘기”
소멸해 가는 운명 가진 존재…내밀한 소통과 연대를 옹호
시적인 문체와 밀도 있는 구성력으로 주목받는 소설가 한강(42)씨가 슬픈 운명을 가진 두 남녀 간의 내밀한 소통을 그린 신작 장편소설 ‘희랍어 시간’(문학동네)을 펴냈다. 199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닻’이 당선되면서 등단한 한씨는 장편 ‘검은 사슴’(1998)과 ‘그대의 차가운 손’(2000), ‘채식주의자’(2007), ‘바람이 분다, 가라’(2010) 등에서 인간의 원초적 슬픔과 외로움을 섬세한 감수성으로 그려왔다.

‘희랍어 시간’은 말을 잃어가는 한 여자와 눈을 잃어가는 한 남자가 언어를 매개로 슬픈 운명의 한 자락에서 만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소설은 비극적 운명의 여자와 남자 얘기가 따로 천천히 전개되다가 어느 순간 하나로 포개진 뒤 급류를 탄다.

여자는 열일곱살 겨울 무렵 원인도 전조도 없이 “그녀를 가두며 찌르던 언어”를 갑자기 잃는다. 그녀의 입술을 다시 달싹이게 한 것은 낯선 불어 단어 ‘비블리오떼끄’. 여자는 대학 졸업 후 출판사 등에서 일하며 시집 3권을 내기도 했지만 결혼에 실패하며 이혼한다. 세 차례 소송 끝에 아홉 살 난 아이의 양육권도 빼앗기고 급기야 다시 20년 만에 말을 잃어버린다. 삶은 검정으로 변한다.

“여자는 목까지 올라오는 검은 스웨터에 검은 바지를 입었다. 의자에 걸어놓은 재킷도 검정색이며, 커다랗고 검은 헝겊 가방에 넣어둔 목도리는 검정색 털실로 짠 것이다… 왼쪽 손목에는 머리칼을 묶는 흑자주색 벨벳 밴드가 둘러져 있는데, 여자의 몸에 걸쳐진 것들 중 유일하게 색채를 가진 것이다.”(10쪽)

모든 것을 잃은 여자가 선택한 것은 이미 거의 죽은 언어가 된 희랍어. 여자는 희랍어 아카데미에서 희랍어 강사를 만나 더듬더듬 대화를 모색하기 시작한다.

15세 때 가족과 함께 독일로 이민에 갔다가 십수년 만에 혼자 귀국해 희랍어를 가르치는 삼십대 중후반의 강사 또한 점점 빛을 잃어가고 있다. 남자는 수강생 중 말을 하지도, 웃지도 않는 여자를 지켜보며 여자의 죽음과 같은 침묵과 마주한다. 남자는 희랍어를 매개로 여자의 슬픔을 조금씩 더듬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가 건물 안에 들어온 새를 밖으로 내보내려 하다가 안경을 잃고 위험에 빠지자 여자가 두 손을 내민다.

“연한 사과향의 목욕비누 냄새가 코끝으로 끼쳐온다. 차갑고 날렵한 두 손이 그의 두 겨드랑이에 끼워진다. 손들이 일으키는 대로 그는 일어선다. 보이지 않는 바닥을 단단히 두 발로 디디려 애쓴다. 보이지 않는 사람의 팔에 의지해 그는 한 발 한 발 계단을 오른다. 그가 발을 헛디딜 때마다 그의 몸을 붙든 팔에 힘이 실린다.”(134쪽)

소설가 한강의 신작 장편 ‘희랍어 시간’은 ‘시간 속에 소멸해 가는 운명을 가진 인간들의 가장 연한 부분’을 시적인 문체로 보여준다.
문학동네 제공
한씨의 소설을 읽는 일은 마치 한 장의 흑백사진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어떤 기미가 발견되고 거기에서 어떤 흔적을 더듬는 우리를 발견하게 된다. 기미와 흔적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선명하게 상을 만들어내 과거와 현재, 그리고 현재진행형의 우리를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소설 ‘희랍어 시간’은 소멸해 가는 운명을 가진 모든 존재들의 내밀한 소통과 연대를 옹호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말을 잃어가는 여자와 빛을 잃어가는 남자는 바로 소멸해 가는 한계적 존재인 우리 자신이고, 이럴 경우 필요한 것은 진심이며 소통이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이소연씨가 “작가는 언어가 몸을 갖추기 이전에 존재하던 것들―흔적, 이미지, 감촉, 정념으로 이루어진 세계로 우리를 데려간다”며 “그곳에서 우리는 죽음과 탄생이 새로운 몸을 얻어 환생하는, 세속의 기적을 목격하게 된다”고 말한 이유다.

한씨는 사이먼과 가펑클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컬러링 끝자락에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이야기이지만 시간 속에 소멸해 가는 운명을 가진 인간의 가장 연한 부분에 대한 얘기”라고 차분하게 말했다.

김용출 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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