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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 예술기행] 쿠바 〈6〉 독립영웅 호세 마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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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1-08-04 01:28:37 수정 : 2011-08-04 01:2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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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자존심의 보루… 암울한 현실서 희망을 부르짖다
아바나 시내를 거닐다 보면 거대한 세트장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게 된다. 퇴락한 건물과 1950∼60년대에 생산된 미국자동차들이 여전히 도로를 질주하는 모습은 시간을 거스르는 초현실주의 풍경이다. 고물 자동차들이 폐차되지 않고 여전히 굴러다니는 모습이 신기하기까지 하다. 민박집 이웃에 사는 청년이 자동차 자랑을 늘어놓기에 그의 집 구경에 나섰다. 집 안엔 미니 카센터를 방물케 할 정도로 수리공구가 다 갖춰져 있다. 부품을 만들 수 있는 수동 공작기계도 눈에 들어온다. 웬만한 부품은 자급자족하고 있는 것이다. 청년은 뭐든 만들어 쓸 수 있다고 우쭐댄다.

최근 들어선 관광객용으로 들여온 중국산 버스와 한국산 승용차들을 거리에서 종종 만날 수 있다. 아바나 외곽을 돌아보기 위해 자동차를 빌렸는데 중국산 자동차다. 한국산 자동차보다 대여료가 훨씬 저렴하다. 한국 차가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다.

비누 칫솔 등 기본 생필품을 팔고 있는 중년여인. 공산품이 풍족하지 못한 쿠바의 현실을 엿보게 해준다.
아침 일찍 주택가에 홀로 좌판을 펼쳐 놓은 중년 여성이 있어 다가가 봤다. 쿠바에서는 흔치 않은 모습이다. 가까이 가 살펴보니 치약을 비롯해 칫솔, 가스라이터 등 생필품 잡화를 팔고 있었다. 골목길로 들어서니 이번엔 1회용 가스라이터를 수리해 주는 남자가 길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그 앞엔 남자들 서너 명이 고장난 가스라이터를 들고 차례를 기다리는 중이다. 쿠바의 궁핍한 현실을 말해 준다.

길거리를 여전히 누비고 있는 1950∼60년대 승용차들. 최근 들어 중국차나 한국차들이 들어오면서 차츰 사라지고 있다.
쿠바에선 어떤 것도 버려지는 법이 없는 것이다. 민박집 주인장 아들은 버려진 철조각들을 주워다 조형물을 만드는 조각가다. 용접기 하나로 나비, 새 등 다양한 형태의 조형물을 만들어내고 있다. 쇳조각들을 구부리고 이어붙이고 해서 만든 추상작품들은 장난감처럼 앙증스럽기까지 하다. 일종의 ‘정크아트’다. 아바나를 떠나는 날 그는 동전에 구멍을 내 목거리를 만들어 선물로 건넸다. 민박집 주인장은 늘 손짓 발짓까지 동원하는 조크로 마음을 편케 해줬다. 쿠바인들은 마음이 푸근한 이들이다.

트럭을 개조해 만든 아바나 시외버스. 아바나 시민들이 인근 소도시로 이동할 때 주로 이용한다.
쿠바에선 미국의 봉쇄정책으로 작물을 키울 비료도 구하기 어렵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이는 쿠바가 친환경농법의 선진국으로 발돋음하는 동력이 됐다. 결핍은 또 다른 충만을 만들어 준다고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건강복지 차원에서의 높은 의료수준도 쿠바 국민에겐 위안이다.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이 쿠바에서 암치료를 받았을 정도다. 콜롬비아에서 만난 한 화랑 주인은 우리가 쿠바에 간다고 하자 엑스레이 사진 등 진료기록을 넘겨주며 쿠바병원에 전달해 줄 것을 부탁했다. 보다 정확한 진단을 받아보기 위해서다.

교육비가 많이 드는 의대도 쿠바에선 학비가 무료다. 대신 의대 졸업 후 외국(주로 중남미 지역)에 나가 2년간 근무해야 한다. 쿠바 외화벌이에 큰 보탬이 되고 있다. 의무복무를 마친 이들에겐 아파트 특별분양 혜택이 주어진다. 고립된 쿠바가 나름대로 제3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쿠바의 유일한 자존심일지도 모른다.

호세 마르티 동상이 세워진 아바나 중앙공원 앞의 ‘그림 나무’. 카스트로 80회 생일 때 31명의 쿠바화가들이 참여해 만들었다.
아바나 중앙공원엔 쿠바 자존심의 보루인 호세 마르티(Jose Marti·1853∼1895) 동상이 자리하고 있다. 그는 쿠바 시인이자 독립영웅으로 식민지 군대인 스페인군에게 사살됐다. 쿠바에서 가장 많이 마주치는 것이 마르티 동상이다. 체 게바라나 카스트로일 거라는 생각은 빗나갔다. 쿠바의 관문인 아바나 국제공항의 정식이름도 ‘호세 마르티 국제공항’이다. 카스트로는 쿠바혁명의 정통성을 마르티에서 찾을 정도다.

길거리 무명화가가 그린 화려한 원색의 ‘미인도’.
우리 귀에 익은 노래 ‘관타나메라’의 노랫말도 그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나메라/ 관타나메라/ 관타나모의 농사짓는 아낙네여// 나는 종려나무 고장에서 자라난 순박하고/ 성실한 사람이랍니다/ 내가 죽기 전에 내 영혼의 시를 여기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바치고 싶습니다//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나메라/ 관타나메라/ 관타나모의 농사짓는 아낙네여// 내 시 구절들은 연둣빛이지만, 늘 정열에 활활 타고 있는 진홍색이랍니다/ 나의 시는 상처를 입고 산에서 은신처를 찾는, 새끼 사슴과 같습니다.’

‘관타나메라’는 쿠바 동부의 ‘관타나모의 시골 여인’이라는 뜻이다. 아리랑처럼 쿠바에서는 제2의 국가로 불린다. 쿠바 민중에 대한 애틋함이 배어 있다. 1960년대 미 반전가수 피트 시거가 불러 서방에 알려졌다. 1966년 보컬그룹 ‘샌드파이퍼스’는 어쿠스틱 기타가 잔잔히 깔리는 노래로 대히트를 쳤다. 관타나모는 스페인과의 독립전쟁의 대가로 미국에 내준 뒤 지금은 쿠바 속 미국으로 알카에다 포로들이 수용돼 있는 곳이다.

호세 마르티
호세 마르티는 1853년 스페인 출신 어머니와 카나리아제도 출신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풍족하지 못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16세 때부터 이미 ‘자유조국’과 같이 주로 쿠바 독립을 고취시키는 내용의 시들을 발표했다. 17세 때 스페인 군대에 입대한 학생을 비난한 편지가 공개되면서 그는 6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된다. 일제하 윤동주 시인을 연상시키는 인물이다.

마르티는 6개월의 수형생활 끝에 스페인 유배길에 오른다. 스페인에서 쿠바 이민자들의 가정교사로 학비와 생활비를 조달하면서 마드리드와 사라고사 대학에서 법학과 문학, 철학 등을 공부했다. 1875년 멕시코로 이주한 마르티는 ‘오레스테스’라는 필명으로 여러 신문사에 사설과 시를 기고하며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쿠바에서 스페인 식민정부가 정치적 추방자들에게 사면령을 내리자 마르티는 1878년 아바나로 돌아와 변호사와 사립학교 교사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각종 모임에서 쿠바의 암울한 정치현실에 비판을 가하면서 스페인 식민지 정부에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혀 다시 유배길에 오르게 된다.

1880년 마르티는 결국 미국 뉴욕에 도착하게 된다. 쿠바혁명당을 조직하여 해외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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