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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성지·항일운동지 순례]〈상〉 中 지린성 ‘화성의숙’

입력 : 2011-07-13 00:33:36 수정 : 2011-07-13 00:3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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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염원 키우던 옛터는 흔적도 없고 들풀만 나부껴

건물도 흔적도 없었다. 그래서 찾는 길이 어려웠다. 너무 많은 세월이 흐른 탓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이다.

중국 내 천도교 성지와 항일유적지 답사에 나선 천도교대학생단(단장 정정숙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장)이 느끼는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길이 없었다. 22명으로 구성된 대학생단이 지난 10일 중국 길림(吉林)성 화전(樺甸)시에 있었던 독립운동의 산실 화성의숙(華成義塾)을 찾아 나선 길을 동행한 느낌이다. 천도교는 물론 국내 단체가 화성의숙을 찾아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0년 전 독립운동사 연구자들 일부가 화성의숙을 다녀간 것 외에는 한국에는 알려진 것이 없는 곳이다.

천도교대학생단이 화성의숙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 게양된 태극기와 궁을기(천도교기) 앞에서 들꽃을 헌화하며 독립군의 넋을 기리고 있다.
일제강점기 천도교는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항일독립운동의 선봉에 선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항일독립운동 근거지는 바로 천도교의 성지이기도 하다. 천도교중앙총부가 주최한 ‘제1회 천도교 대학생단 민족정신을 찾아서’는 이국 땅에서 흔적조차 없어져 가는 피눈물 어린 근·현대사의 현장을 젊은 세대에게 올바로 알려주자는 취지에서 마련됐다.

화성의숙은 독립군 간부 양성을 위한 2년제 정치·군사학교로 1926년 설립됐다. 설립자인 초대 숙장(교장)은 천도교인으로 임시정부 법무부장을 지낸 의산 최동오 선생이다. 그는 천도교 최고지도자였던 최덕신 교령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원래 화성무관학교로 이름을 붙이려다 일제의 감시를 고려해 화성의숙이라 했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은 14살 때인 1926년 잠시 화성의숙에 재학하면서 최동오 선생으로부터 민족주의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북한도 화성의숙을 혁명유적지로 여긴다.

화성의숙이 설립될 당시는 상해임시정부가 제 기능을 못하자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라는 각각의 단체가 만주를 중심으로 나름대로 정부의 역할을 하던 때였다. 정의부 주도로 설립된 화성의숙은 민족주의 교육에 철저했다. 학교 앞에는 ‘휘발하(輝發河)’라는 강이 흘렀는데, 화성의숙 학생들은 휘발하에서 도강 훈련 등을 했을 것이다. 국내진공작전의 선봉에 서서 일제로부터 “조국을 되찾겠노라”고 다짐을 거듭하며.

화성의숙 학생들이 해상 훈련을 했다는 ‘휘발하’는 시민들이 쉬어갈 수 있는 넓은 호수공원으로 변했다.
이 학교는 세월과 함께 잊혀졌다. 중국 땅에 있다는 것이 망각의 속도를 더욱 빠르게 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은 우리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하는 중국에서는 자고 나면 길거리가 빌딩숲을 이룰 정도로 ‘일신우일신’하곤 한다. 오랜 세월 잊혀졌던 곳을 찾아간다는 것 때문에 가슴 한편에서는 두근두근 설렘이,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우리는 여태까지 무엇을 했는지 울분이 치밀어 올랐다.

집안(集安)에서 통화(通化)를 거쳐 버스만 8시간 이상을 타고 도착한 곳은 화전시 화전진 인민로 앞 광장이다. 10년 전 자료에는 인민로 옆 작은 도로변에 세워진 아파트 자리가 남아 있다고 했다. 그러나 도착한 인민로 앞에는 커다란 인민광장이 보일 뿐 그때 그 아파트는 간 데도 없다. 인민광장 앞에는 넓은 호수가 펼쳐져 있다. 인근 조선족 주민 등을 만나 수소문한 끝에 화성의숙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을 찾았다. 다름 아닌 인민광장 왼쪽 벤치 부근이다. 들풀과 들꽃이 한여름 햇빛에 풀빛만 더욱 빛을 발하는 곳이었다.

지금은 호수 공원으로 변해버린 휘발하. 홍수가 잦은 하천 휘발하는 물길도 옛날과 달라졌다. 급속하게 성장하는 중국 경제는 화성의숙의 옛 모습을 사라지게 했다. 대학생단은 그 옛날 이곳에서 분루를 삼키며 독립의 날을 준비했던 독립군, 들꽃과 들풀처럼 살다간 이들을 회상하며 들꽃을 꺾어 청수와 함께 예를 올렸다. 그리고 독립군가를 봉정했다.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싸우러 나아가세.”(독립군가 중에서)

이국 땅에서 울려퍼지는 힘차고 경쾌한 독립군가 후렴구가 대학생단의 마음을 잔잔하게 흔들었다. 새로운 기운을 받은 대학생단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청산리전투와 3·13 독립만세 운동의 현장인 지린성 화룽(和龍)시와 룽징(龍井)시로 향했다.

집안·화전=신동주 기자 ranger@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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