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솟아날 구멍있다” 우리속담, 그들에겐 불경스런 ‘생철학’
‘파이브 스타 스토리스’라는 만화가 있다. 일본 만화 마니아 사이에서 모르면 간첩으로 대접받는 작품이다. 영어 제목의 첫머리를 따 ‘FSS’로도 불리는 이 만화는 마모루 나가노(永野護)가 1987년 첫 그림을 그린 이래 무려 18년간 애니메이션 전문 잡지에 연재됐던 SF 작품이다. 하지만 아직 12권까지밖에 그리지 못했고, 최근엔 아들에게 대물림해 만화를 그리겠다고 밝히면서 더욱 화제가 됐다. 이유는 간단하다. 5개 별에 존재하는 수많은 국가의 주인공들이 역사와 지역을 초월하며 등장하는 탓에 이야기의 동선이 상상을 초월하는 스케일로 펼쳐지는 까닭에서다.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는 일본 신화에 등장하는 태양신으로 일본 고유 종교인 신토 최고의 신이다. 사진은 자신이 동생인 스사노오의 행패를 보다 못해 동굴 속에 은둔했을 때 세상이 어둠에 휩싸이자 다른 여러 신이 그녀를 달래기 위해 ‘이와토카구라(岩戶神樂)’라는 민속음악을 연주하는 1857년의 그림이다. |
재미있는 사실은 그런 ‘파이브 스타 스토리스’의 주인공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의 이름이 ‘아마테라스’라는 사실. ‘아마테라스’가 누군가? 바로 일본 건국신화에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태양신’ 아닌가? 그렇다. ‘파이브 스타 스토리스’는 수십, 수백 명의 신들이 등장하는 탓에 웬만한 이들은 등장하는 인물들의 절반도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일본 신화가 스토리 라인의 모티브를 제공하고 있다. 일본 신화가 얼마나 복잡하냐 하면, 가장 중요한 단군과 주몽에 해당하는 아마테라스와 진무(神武) 천황이 나올 때까지의 이야기만 봐도 알 수 있다. 다음은 그 대략적인 줄거리.
1987년부터 2004년까지 무려 18년간 연재됐다가 지금은 발행이 중단된 마모루 나가노의 ‘파이브 스타 스토리스’. ‘FSS’로 불리는 이 만화는 현재까지 12권이 나왔으며 일본 신화를 바탕으로 7000년에 달하는 우주의 역사를 장대하게 그려내고 있다. |
왼쪽 눈을 씻을 때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御神)라는 태양의 여신이, 오른쪽 눈을 씻을 때 쓰쿠요미 노미코토(月讀命)라는 달의 여신이, 코를 씻을 때 스사노오오 노미코토(須佐之男命)라는 바다의 남신이 생겨난다. 스사노오는 맡겨진 나라를 다스리지 않아 이자나기에게 쫓겨난 뒤 누나인 아마테라스를 찾아가 그곳에서 난동을 부리다 추방된다. 그 후, 스사노오는 이즈모노쿠니(出雲國)로 내려가 사람들을 괴롭히던 머리가 8개 달린 큰 뱀을 죽이고 나라를 세운다. 그 직계 후손인 오쿠니누시 노카미(大國主神)는 야가미히메(八上姬)와 결혼하여 다른 형제들이 물려준 나라까지 다스리게 되었다. 후에 천상계에서는 신의 자식을 내려보내 땅을 다스리게 했는데 이때 니니기 노미코토(瓊瓊杵尊)라는 신이 옥·거울·검 등 신기 3종 세트를 가지고 내려와 여러 신을 낳았고, 그의 직계 증손자인 와카미케누 노미코토(若御毛沼命)가 일본의 초대 천왕인 진무(神武)가 되었다. (네이버 백과사전 참조)
복잡다단한 일본 신화가 지니는 또 다른 특징은 바로 통치자의 시조만 나와있을 뿐, 인류의 조상에 대한 기원은 나와 있지 않다는 것이다. 즉, 우리의 단군 신화가 곰에서 인간으로 환생한 웅녀를 통해 우리 민족 자체의 기원을 나타내고 있는데 비해 일본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통치자가 일반 백성들을 다스리는 단순 구도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한국에서는 인간의 창조와 관련해 지역에 따라 다양한 유래가 전해지고 있지만, 일본의 경우는 건국 신화가 오직 한 가지로 통일돼 있다. 예를 들어, 우리네 전승 신화는 지역에 따라 미륵이 하늘에서 금벌레와 은벌레를 따다가 세상에 뿌려 사람을 만들었다거나 혹은 인류가 흙에서 빚어졌다고 전하는 등 다양한 판본이 존재하고 있다. 이에 비해 열도의 전승 신화는 만세일계의 천황이 아마테라스의 자손으로 강림해 일본을 다스려왔다는 한 가지 모범 답안만 고수하고 있다.
일본 야후 웹사이트에서 일기예보가 차지하는 정보의 비중은 대단히 높다. 사진은 지난 18일, 일본 야후에서 제공하고 있는 일기도. |
그래서일까? 일본에서는 하늘을 절대자로 받아들이며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초자연적 대상으로 대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흔히 ‘낙하산 인사’라고 부르는 비전문직 고위 관료층의 전문직 임명도 일본에선 ‘아마쿠다리’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아마’란 하늘을, ‘쿠다리’란 하강을 뜻하는 말로 두 단어를 합치면 결국 ‘강림’을 뜻하는 단어가 된다. 한국에선 낙하산 배낭을 둘러메고 비행기에서 뛰어내리는 ‘속세의 꼴불견’이 일본에선 인간의 힘으론 어찌 해볼 수 없는 ‘신의 영역’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이와 함께 한국인들에겐 해의 기운에 따라 결정되는 날씨가 일기(日氣)로 일컬어지는 반면, 열도에선 하늘의 기운으로 받아들이는 ‘천기(天氣)’로 일컫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물론, 이면에는 태풍과 돌풍, 호우와 호설(豪雪)을 시도 때도 없이 쏟아내는 하늘을 일기만으로 표현할 수 없는 지리적 아픔도 묻어 있지만.
그런 의미에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라는 우리네 속담은 ‘하늘이 무너지면 온 세상이 끝난다’고 믿고 만사를 포기하는 일본인들의 관점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불경스런 ‘생철학(生哲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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