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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30> 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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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1-04-19 08:46:29 수정 : 2011-04-19 08:4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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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의 광풍속에 추억이 되어버린 한강의 모래사장
밤섬 퍼내 여의도 만들고 저자도 모래로는 압구정
굽이치던 한강 곧게 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
화장술 같은 도면 의존보다 자연의 풍경 되찾기를
한강에서 길을 잃다

한강은 폭이 1㎞ 내외의 큰 강이다. 인구가 천만이 넘는 거대한 도시의 위상에 걸맞다고 볼 수도 있고, 풍수지리적으로 배산임수라는 훌륭한 조건을 충족시켜 준다고도 한다. 청계천이 서에서 동으로 흘러 역수(逆水)의 역할을 해줌으로써 균형을 잡아주고, 북한산에서 흘러나오는 바람이 세종로를 지나 삼각지와 용산을 거쳐 한강으로 향하며, 도시의 공기를 정체되지 않게 해주는 공기정화기 역할을 해준다는 것이다.

청계천과는 반대로 한강은 동서로 흐른다. 그런데 한강이 흐르는 방향은 늘 헷갈린다. 지하철로 한강을 건널 때 아래로 흐르는 강이 어느 방향으로 가는 걸까 잠시 방향을 잃고 헤맨다. 다리를 건널 때도 그렇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서울 외곽에서 시내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각종 이름의 다리들을 건너야만 했다. 나는 특히 선유도와 당산철교와 절두산 성당, 멀리 보이는 밤섬까지 다양한 풍경을 양쪽에 줄줄이 거느린 양화대교를 건너가는 것을 좋아해서 일부러 그 노선의 버스를 타곤 했다. 요즘 동네 곳곳 지하철이 들어와 심지어 한강 아래로도 터널이 뚫렸는데, 5호선을 타고 마포에서 여의나루로 갈 때면 머리 위로 한강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가슴으로는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2005년 여의도 모래사장. 한 아이가 오리를 보며 한강에 손발을 담근 채 놀고 있다.
고요한 도시의 배경, 풍경으로서의 한강은 때로는 사나운 자연으로 돌변한다. 1990년인가 큰 비가 내려 양화대교가 며칠간 통제되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한강 수위가 낮아지기만 기다렸던 적이 있다. 강에 흐르는 물의 양이 최고일 때와 최저일 때의 비율을 하상계수라고 하는데, 유럽의 강들이 대체로 10∼50 범위의 안정된 강들인 데 비해, 한강은 댐 설치 전에는 하상계수가 450 이상이나 될 정도 다스리기 힘든 강이었다. 그러다 보니 홍수 때마다 흐름이 바뀌거나 섬이 생겼다 잠기기도 하는 등, 한강은 천변만화하는 변덕스러운 성격과 다양한 얼굴을 가진 강이다.

‘천하장사 마돈나’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해 늘 따스한 시선을 보내는 이해준 감독이 만든 영화 ‘김씨 표류기’는 밤섬이 배경이다. 빚에 시달리던 김씨는 투신자살을 하려다가 그만 로빈슨 크루소처럼 밤섬에 표류한다. 머리 위로는 자동차가 씽씽 달리고 섬 주변으로 유람선들이 돌아다니는데, 아무도 그를 봐주지 않고 구원해 주지 않는다.

밤섬은 예전에 꽤 많은 집들이 있는 제법 버젓한 섬이었다. 그러나 여의도에 활주로를 만들면서 밤섬 주민들은 강제 이주를 당했고, 밤섬을 폭파시켜 그 흙을 퍼다 쌓은 섬이 여의도이다. 그리고 그 섬은 영혼만 남아서 한강에 둥둥 떠다니고, 지금은 하늘에 둥둥 떠다니는 새들이 기거한다. 그리고 우리는 강변도로를 달리거나 여의도에서 마포로 갈 때나 서강대교를 건너며, 멀고 먼 이어도를 보듯이 아련한 눈으로 그 섬을 쳐다보곤 한다.

지워진 섬… 무언가 강력한 상징을 보여준다. 

◇서울시의 ‘한강 르네상스’ 계획 일환으로 깔끔하게 정비된 여의도 63빌딩 앞 샛강과 한강이 만나는 부분.
사라진 섬들의 풍경


한강에는 섬이 많다. 여의도, 노들섬, 선유도, 저자도, 잠실도, 부리도, 난지도…. 일부는 섬으로 살아 있고 일부는 이름만으로 남아 있고, 일부는 그냥 흙이고 일부는 돈이고 황금이다.

1960년대 말 김현옥 서울시장 시절부터 한강변에 도로를 만들고 개발하면서 여의도는 밤섬을, 압구정지구는 저자도를 퍼내 만들었고, 원래 강의 북쪽에 붙어 있다 홍수로 떨어져 나온 잠실도와 부리도를 물길을 막아 남쪽으로 붙이며 잠실운동장과 삼성동 근처의 금싸라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굽이치던 한강은 곧게곧게 펴져서 사뭇 다른 강의 모습이 되어, 인걸도 간데없고 산천도 의구하지 않게 되었다. 그때 재미 본 사람들 중엔 아직 유지하는 사람도 있고 많이 까먹은 사람도 있다는데 그 치부의 과정이 무지막지하다.

서울이라는 도시가 만들어진 과정들을 각종 자료를 통해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는 손정목 선생의 명저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는 건축가나 도시계획가, 역사학자들에게 필독서로 읽히는 책이면서 어떤 대중소설보다도 흥미로운 책이다. ‘공유수면 매립’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으로 홍수로 인한 피해를 대비한다는 명분 아래, 한강에 제방을 쌓는 사업이 어떻게 공익이 아닌 개인들의 이익에 기여했는지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다.

대규모 건설 회사들에게 공유수면 매립공사라는 것은 정말 땅 짚고 헤엄치는 사업이었다.

국유하천에 제방을 쌓고 폐천이 된 하천부지를 택지로 조성한다. 그것도 건설업 비수기인 겨울철, 12월부터 4월까지 놀고 있는 중장비와 노동력을 이용하여 우선 첫해에는 제방만 쌓아 놓고 쉬었다가 다음해 건설 비수기에 모래를 갖다 퍼부어 택지를 조성한다. 이렇게 조성한 땅은 국영기업체나 정부투자기관에서 일괄 매수해간다. 일괄 매수해가지 않으면 자기들이 아파트단지를 조성해서 일반에게 분양한다. 절대로 손해를 보는 일이 없는 이권사업이었다(손정목의 ‘서울도시계획이야기 3’, 190쪽에서).

급기야 한강 토사가 바닥나자 당시 대부분 연탄재였던 서울에서 나오던 쓰레기들을 매립하고, 그 위에 지하철공사 등 시내의 각종 공사장에서 나온 흙을 덮고 다져서 각종 ‘지구’들이 만들어지고 그 위에 아파트들이 세워졌다. 짧은 기간 동안 이루어진 그 한편의 드라마를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렀다.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마치 쓰레기 더미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 1950년대 한 외신기자가 예언하듯 악담을 퍼부었지만, 꿋꿋하고 엄청나게 앞으로 앞으로만 나아가서 오늘날 우리는 필리핀보다 잘살고, 방글라데시보다 잘살며, 미얀마보다 훨씬 잘살게 되었다.

그런 저런 모습을 한강이 보고 있다.

◇한강 모래사장 스케치.
아주 오래된 이야기


기억 속에서 한참 뒤적거리다가 찾아낸 가장 오래된 한강에 대한 기억은 내가 5살 정도 되었을 무렵, 가족끼리 여름에 피서를 갔던 뚝섬유원지에서였을 것이다. 당시 인천 송도와 더불어 여름에 물놀이하는 장소로 아주 각광받던 곳이었는데, 나는 가족들과 수영복을 입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물속으로 첨벙첨벙 걸어 들어갔다. 튜브를 끼고 물에서 놀고 있는데, 아마도 비가 많이 오고 난 후였는지 물이 탁하고 무언가 많이 둥둥 떠다녔었다. 그리곤 내 눈앞으로 어떤 부유물이 하나 떠가는 것이 보였는데 놀랍게도 누런 오물이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또렷하게 기억하는 것은 그 충격적인 영상 때문일 것이다. 그 뿌연 물과 누런 부유물이 내 기억 속으로 지금도 아주 느릿하게 흘러간다. 낡고 무척 컸던 튜브, 물속에서 좋아하던 수영복 차림의 청춘 남녀들, 그리고 강에 닿아 있던 푸실한 모래턱 등등 한강은 그냥 강의 일반적인 모습, 콘크리트 끼가 전혀 없는 순박한 모습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그때의 기억이 흑백이라면 몇 년 뒤의 기억은 무척 생생한 컬러 색상이고 아주 구체적이다. 나는 후암동에 있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그 앞에 있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중학교에 가고 싶었으나, 냉정한 ‘뺑뺑이’의 장난으로 방금 건물이 준공된 신생 중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학교 이름이 한강중학교였는데, 그 당시 ‘한강대학교 퐁당과’ 운운하는 아주 썰렁한 농담이 장안에 떠돌고 있어서 집안이나 동네에서 그 이야기를 들먹이며 나를 놀려댔다.

내키지도 않는 마음으로 한강중학교에 가보았다. 용산역 앞에서 내려서 한강 쪽으로 걸어가서 한강을 끼고 이촌동을 한참 걸어 들어가니 강과 거의 맞닿아 있는 학교가 있었다. 마치 강으로 뛰어들 기세로…. 마당과 강 사이에 심어 놓은 껑충한 잣나무들이 마치 일렬로 손을 잡고, 강으로 뛰어들지 못하게 막아서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한강의 전망을 확보하고 있는 아주 비싼 입지였다.

그리고 나는 시선을 넘겨서 한강을 보았다. 참 크고도 긍정적인 강이었다. 당시만 해도 여기저기 동네마다 여름이면 악취를 뿜어내며 온갖 날파리와 모기들을 키워내는 검은 개천들만 보다가, 흐르는 것인지 잠을 자고 있는지 나를 보고 있는지 속을 알 수 없는 한강을 그날 처음 본 것 같았다. 교실에서 옆으로 고개만 돌리면 한강과 눈이 마주치는 듯했고, 여름에는 아주 시원했으나 겨울에는 강바람이 살을 에었다.

그때 문경 점촌에서 전학을 온 내 짝은 서울에 입성해서 저렴한 집을 찾다가 지금의 신사동, 영동대교 지나 바로 강 근처에 살게 되었다고 했다. 비가 많이 오면 물이 범람하는 강 바로 옆 오래된 집을, 채마밭을 낀 오래된 집을 사서 온 식구가 문을 떼어내어 물을 뿌리며 닦곤 했다. 정말 옛날 이야기이다. 

◇깊은 그늘이 있고 바람이 언제나 시원하게 부는 원효대교 아래에서 사람들이 한가롭게 쉬고 있다.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몇년 전 별다른 계기도 없이 여의도에 살았던 적이 있다. 어릴 적의 기억 때문인지, 한강물은 몸에 닿으면 안 되는 물이라는 생각이 아주 깊게 각인이 되어서, 한강을 끼고 살면서도 물에 손을 담그거나 발을 담근 적은 한 번도 없다. 이를테면 스킨십이 전혀 없는 서로 서먹한 관계이면서도 애틋해하는 아주 야릇한 사이가 되었다.

그러다 어느 날, 63빌딩 언저리의 강과 맞닿은 면이 크게 곡선을 그리는 곳, 노량진 쪽에서 나오는 샛강과 한강이 합수되는 부근에 남아 있는 아주 작은 모래사장에 다다랐다. 예전에 백만 군중이 운집했었고, 신익희 후보가 사자후를 토해내던 그 많던 한강 백사장은 모두 콘크리트 피부로 이식된 채 숨어 들어가고, 미처 따라 들어가지 못한 모래 몇 줌이 한강에 남아 있는 것이 마치 폭격 후에도 살아남은, 아니 매몰현장에서 물 한 병으로 두 달을 버틴 생존자처럼 반가웠다. 그 모래사장 근처에는 나무가 몇 그루 아주 유장하게 서 있었고, 두 패로 나뉘어 몰려다니는 오리들이 사이좋게 살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종종 그 모래사장에 나가서 오리를 보며, 물에 손발을 담그며 즐겁게 놀았었다. 그리고 잠깐 한눈파는 사이, 그 모래사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영동대교 부근부터 여의도 63빌딩까지 한강을 따라 걸으면 두 시간 반 정도 걸리고, 거리로는 삼십 리, 12㎞ 정도 된다. 오랜만에 그 길을 걸었다. 마라톤대회에 참가한 사람들, 착 달라붙은 옷을 입고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떼를 지어 롤러블레이드를 타는 사람들이 파란 선을 경계로 걷는 사람들과 나뉘어 달리고 있었다.

안개가 끼어 멀리까지 보이지는 않았지만 봄날을 맞아 여기저기 꽃들이 팝콘 터지듯이 터지고 있어서 더할 수 없이 좋은 날이었다. 강이 있는 곳에 늘 임하고 있는 포클레인은 이제 아주 일상적인 풍경이 되어서, 예전에 강나루에 나룻배가 서 있는 것처럼 아주 스스럼없이 제집인 양 푸근하게 앉아 있었다.

현 서울시장의 역점 사업인 ‘한강 르네상스’가 계속되는 것인데, 좀 좋게 본다면 그간 부분부분으로 끊어져 있던 강변의 휴식공간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가는 중간 잠수교 앞에서 신호등이 있는 건널목 한번 건널 때 기다린 것 외에는 다른 지장물이 없어서, 내내 강의 흐름과 평행하게 딴생각을 하면서 걸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단점이라면 자의식 과잉의 디자인이 잔뜩 이식되어 있는 필요 이상으로 잘 꾸며진 건물, 조경물들이다. 비행기의 시각, 혹은 새의 시각으로 디자인이 되어서 인간의 시각으로는 도저히 그 아름다움을 느끼기 힘들었고, 무엇보다도 피할 데 없는 ‘땡볕’에 눈이 부셔 죽을 지경이었다. 손바닥만 하게 만들어진 ‘자연형 호안’은 사뭇 옹색해 보였고, 상대적으로 녹지는 상당히 절제되어 있었다. 그간 들인 전체 공사비로 보면 그야말로 ‘새발의 피’격인 나무값을 아끼지 말고 듬뿍 심었다면 얼마나 보기 좋고 시원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강은 기적을 부를 만큼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 주기도 했고, 이제는 도시의 이미지를 격상시켜 줄 단서로 끊임없이 단장을 하고 있다. 이왕이면 조명 아래서 잠시 눈을 현혹시키는 화장술 같은 도면이나 컴퓨터 그래픽에 좌우되지 말고, 사람의 눈높이와 손발의 감촉까지 생각하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돌아오면 좋겠다.

한강 다리 아래는 아주 깊은 그늘이 있고 바람이 언제나 시원하게 분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나듯, 여름날 그늘이 턱도 없이 부족한 한강변을 거닐다 다리 아래로 들어가면 바람을 쐬는 사람들로 그득하다. 좋은 풍경, 멋진 그림보다 사람들이 원하는 건 그런 정서를 품고 체험할 수 있는 한강일 것이다.

가온건축 공동대표·‘이야기로 집을 짓다’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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